[삶의 기쁨] 부천덕산초등교 교사 최성희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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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개학후 첫 바른생활 수업시간. '약속을 잘 지키려면' 을 주제로 아이들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해요. " "장난치지 말고 필요할 때만 약속을 합시다. " 아이들의 발표를 듣다가 몇년전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 떠올라 들려주었다.

내용인즉 졸업을 앞둔 어느 학교 6학년 3반 아이들과 선생님이 ○○년 6월 3일 63빌딩에서 오후 6시30분에 만나기로 했고, 약속장소에 일찍 간 주인공은 초조하게 기다리다 결국 동창들과 선생님을 만나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교사로서 첫발을 내딛고 있던 내게 진한 감동을 준 사연이어서 고학년 담임때도 몇번 이 얘기를 전했건만 그저 감동적인 내용으로만 여길 뿐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그때 갑자기 반장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도 약속을 하자고 졸라댔고 순식간에 교실안은 난리가 났다.

아이들과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기 위해 연구한 결과, 2학년 8반인 우리는 2008년 6월 10일 오후 6시10분에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6과 10은 2와 8을 더하거나 빼서 나온 숫자였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메모를 했다.

나중에 들으니 집에 가 자랑도 하고 그때 꼭 알려달라고 가족들에게 당부도 했단다. 그 소리를 들으니, 아직 너무 어려 돌아서면 잊을 거다 싶어 실망하지 않으려고 애써 아이들의 진지한 약속태도를 무시하려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미안했다.

이젠 나 또한 가슴에 2008년 그날에 대한 고운 설렘을 남겨놓았다. '그땐 이 아이들이 키가 훌쩍 커져 날 내려다보겠지□ 목은 좀 아프겠지만 참 행복하리라' 하며.

최성희<부천덕산초등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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