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법 개정안 발의 계기 최고 재판기관 지위 놓고 20년 묵은 갈등 표면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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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권한을 확대하는 내용의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대립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입법적 해결이 가장 옳은 방법”이라고 밝혔고 대법원은 법 개정 반대를 분명히 했다. 사진은 2007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한 이용훈 대법원장(왼쪽)과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중앙포토]

“대법원의 헌법상 지위를 설명하고 헌법재판소와의 관계를 논하라.”

1992년 치러진 제34회 사법시험 2차 시험에 출제됐던 헌법 과목 문제다. 대학교수 2명과 함께 이 문제를 출제한 이는 당시 부산고법 부장판사로 있던 이강국 헌재 소장이었다. 이 소장은 15년 후인 2007년 1월 헌재 소장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한정위헌을 둘러싼 갈등은 입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란 의견을 밝혔다.

이 소장이 말한 ‘입법적 해결’을 놓고 올가을 정기국회에서 대법원과 헌재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민주당 전현희 의원과 한나라당 이주영 의원,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 등이 각각 별도로 변형 결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헌재법 개정안 3건을 발의하면서다. 헌재 측은 “헌재와 관계없이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낸 법안”이란 점을 강조하면서도 ‘국회 통과’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대법원은 의견서에서 보여지듯 ‘극력 반대’ 태세를 분명히 했다. 대법원 측은 법사위 소속 의원들에게 해당 개정안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갈등은 88년 헌재 출범 직후부터 계속돼 왔다. 두 기관의 위상과 영역이 분명하게 교통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법원만이 법률 해석·적용 권한을 갖는다’는 대법원과 ‘법률 해석이 헌법에 맞는지에 대한 판단도 헌법재판의 영역’이라는 헌재의 시각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96년 헌재가 양도소득세 부과 규정에 한정위헌 결정을 한 뒤 대법원은 관련 규정을 합헌으로 보고 해당 사건에 대한 판결을 선고했다. 그러자 헌재가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취소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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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측은 “소송 당사자가 상반된 대법원 판결과 헌재 결정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 있다”며 혼란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법 개정 시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받은 뒤에도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을 받으면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게 된다”며 “결국 4심제로 가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근본적인 해법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 기관을 통합하는 것이 이상적”이란 게 대법원 입장이다. 헌재는 “법원 재판도 헌법재판 대상으로 삼는 ‘재판소원제’ 도입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시한다.

현재 독일과 이탈리아·몽골·베트남 등 75개 국가가 대법원 이외에 별도의 헌법재판소를 두고 있다. 독일에서는 헌법상 최고 사법기관인 연방 헌법재판소가 한정위헌 결정을 할 수 있고, 그 효력도 인정된다. 반면 대법원과 헌재가 동등한 지위에 있는 오스트리아에서는 한정위헌 결정을 허용하지 않는 등 역사적 배경과 사법 시스템에 따라 각각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미국·일본·영국 등은 별도의 헌법재판 기관이 없으며, 연방대법원이나 최고재판소에서 위헌 여부를 가리고 있다.


권석천·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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