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재진 '산'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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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 때 내려가라 했을 때 하산해야 했습니다

내 것 아닌 깨달음에 속아 나는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잠 속에서 새가 울었습니다

잠 속에서 우는 새는 깜깜하고 젖어 있었습니다

날개가 없었습니다

날개도 없는 새를 날려 보내기 위해 나는 물 위로

쥐고 있던 화두를 놓아버렸습니다

날개 없는 새가 무용지물이듯

혼자서 깨달은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산을 내려가는 사람들이

나무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게 보입니까

- 김재진(44) '산' 중

이제 화두라는 낱말이 사회과학담론에도 잘 나온다. 그 전에 산중 깊숙이 그 게 뭔지 모르게 은밀했던 화두가 하얗게 바래졌다. 시에서도 화두가 잘 보인다. 여기에도 있다. 화두라는 낱말 하나가 이런데 가령 내 이름 아무개도 몇십년 동안 세상에 떠돌았으니 얼마나 낡아버렸고 바래졌을까. 세상에 미안하기 짝이 없다.

이 시는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주 웅숭깊은 수행의 한 단면을 노래한다. 서술형 경어체 속에는 간화선(看話禪)을 중단하고 세상으로 내려가야 할 심지가 어엿하다. 그래, 혼자서 깨달은들 그게 무슨 개코이겠는가. 깨달음이란 기어이 사회요, 세상이요, 그런 것 아니겠는가.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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