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괘씸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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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10년 전인 1994년 11월. 지금은 우리은행에 흡수된 한일은행의 윤순정 행장이 돌연 사임했다. 윤 행장은 지방에 내려갔다가 사임서를 팩시밀리로 보냈다. 사임서에는 '먼저 말씀드릴 것은 절대로 타의에 의한 건 아니라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윤 행장이 자의로 사임했다고 믿는 사람은 없는 분위기였다. 윤 행장이 사임하기 몇 달 전부터 금융가에는 그에 대한 투서가 나돌았고 집권층에서도 그의 사임을 원한다는 소문까지 떠돌았다.

정권이 바뀌면 집권세력과 다른 줄을 잡았던 은행장들은 옷을 벗는 게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으레 금융계 사정설이 나돌고, 털어 먼지없는 사람이 없다는 세간의 인식대로 여러 은행장이 모호하게 사임하곤 했다. 이를 의식했던지 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은행장 인사에 절대 간여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직후 제일은행장과 현재 하나은행에 합병된 옛 서울신탁.보람 은행장이 임기 도중 물러났다. 외환은행장도 취임 한달여 만에 사임했다. 물론 당시 금융계 사정설이 파다했고, 스스로 물러나지 않고 버티다 쇠고랑을 찬 은행장도 있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외환위기 때문인지 금융계 사정설이 뜸해졌다. 대신 구조조정 과정에서 공적자금이 들어간 은행의 인사를 정부가 사실상 결정했다. 은행 경영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다는 취지에서 비(非)은행원 출신이 은행장으로 발탁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때 김정태씨가 증권사 사장에서 주택은행장(현 국민은행장)으로 발탁됐다.

오는 10월이 임기인 김 행장이 연임할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이다. 자회사인 카드사를 합병하는 과정에서 회계처리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김 행장이 문책적 경고를 받게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국민은행 측은 전문가는 물론 국세청 자문까지 받아 회계처리한 사안이라며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그래선지 은행가에서는 괘씸죄 때문이라며 '신(新)관치'의 등장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다고 한다. 김 행장이 LG카드 지원 등에 대한 정부 방침을 호락호락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강조하고 있는 이헌재 경제팀이 신(新)관치라는 비판을 받는 모습에 시장은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하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