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제부터의 남북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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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베를린 북.미회담의 타결은 한반도 냉전 종식과 평화정착을 향한 길에서 하나의 전기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타결은 무엇보다도 한반도 긴장고조의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이뤄졌다면 한반도 위기가 급격하게 고조됐을 것이며, 이는 그 자체로도 불행일 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의 회복과 발전에 중요한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또한 이번 타결은 한.미 양국이 사실상 공동 작성한 포괄적 협상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장 (場) 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유예는 그들이 페리 보고서로 상징되는 포괄적 협상안을 검토할 용의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포괄적 포용정책은 이제 협상단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사실 북한은 미사일 발사 유예 문제를 놓고 이해득실을 깊이 따져보았을 것이다.

그 결과 현재의 경제난과 외교적 고립상태에서는 미사일 발사가 주는 부정적 영향이 너무 크다고 판단해 경제적 실리와 외교적 고립탈피라는 기회를 얻기 위해 유예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들이 대결과 협상의 기로에서 후자를 택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특히 서해교전에서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경험했기 때문에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더욱 매력을 느낄만도 한데 타협으로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앞으로 북.미간에 베를린 합의를 실천하기 위해 미사일 문제와 관계개선 문제를 다룰 실무급 후속회담이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이번 타결이 미사일 발사 중단이 아닌 발사 '유예' 라는 점에서 실무급 회담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고위급 회담은 불가피하다.

페리 - 강석주 라인으로 점쳐지는 이 회담에서는 페리 보고서를 둘러싸고 긴 줄다리기가 예상된다.

현재 페리 보고서의 핵심내용은 북한이 완전한 핵동결과 미사일 개발.시험발사.수출을 중단하는 대신에 미국과 서방은 북한 체제를 보장해주고, 북.미, 북.일관계를 정상화하며 다차원에서 대북 경제지원을 실시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도의 제안이라면 북한으로서도 쉽게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시간을 끌며 수정요구를 통해 이 안을 약간 일그러뜨려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이번 타결은 대북 포용정책의 추진에 탄력을 가하게 할 것이다.

한국 정부는 북한 미사일과 금창리 지하시설문제로 한반도 위기가 고조됐던 지난해 말부터 대북 포용정책에 기초한 포괄적 협상을 미국에 제시하고 조율해왔다.

그 결과 포용정책은 초기에 독자적인 우리의 대북 정책에서 지금은 한.미.일 3국의 공동정책으로 공식화됐다.

이번 북.미 베를린 회담도 그 틀에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타결로 포용정책의 적실성이 한차례 검증된 것이며, 포용정책에 기초한 한반도 위기관리가 효과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베를린 타결은 남북관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를 강행했다면, 당장 금강산 관광사업을 포함한 경협 중단을 요구하는 강경론이 온 사회에 휘몰아쳤을 것이다.

이는 미사일 발사 유예 자체가 이미 남북관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부로서는 베를린 회담의 성과를 한 걸음 진전된 남북관계 개선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섬세한 전략 수립이 필요한 때다.

현재 남북관계에서 최대의 과제는 북한이 국지적 도발을 근본적으로 중단하고 남북 평화공존의 필요성을 인식토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강력한 안보태세의 확립을 바탕으로 해 포용정책이 북한체제 내부의 변화를 유도하는 정책이 아니라, 남북한간에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평화공존을 이룩하도록 하자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북한의 대남혁명노선 포기와 남한의 대북 붕괴위협 불원 (不願) 을 서로 맞바꾸는 평화의 대타협을 이끌어내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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