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중국의 한반도 정책 냉철히 봐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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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약자’가 압박을 받으면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나 북한은 그렇지 않다. 중국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원자바오 중국총리는 ‘북한이 6자회담에 참여토록 하기 위해 원조를 결정했다’는 식으로 발언했다. 물론 중국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속마음은 ‘북의 핵 보유 인정과 체제보장’을 바라는 것이다. 수십 년간 김정일 정권이 단독 대미협상 운운하며 배짱을 부리는 것은 중국의 정치적 후견에 힘입은 바 크다. 북한은 핵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에게 중국은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격이다.

한국은 중국의 이런 한반도 정책을 깊이 있게 연구, 대처해야 한다. 무엇보다 여야를 초월한 민의의 바탕 위에 대북정책이 수립돼야 한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이에 대해 유엔이 제재를 가하고 있는 현 시점에선 곤란하겠지만, 우리의 반쪽이자 가난한 북한을 ‘알게, 모르게 지원하면서 감싸 안겠다’는 마음은 갖고 있어야 한다. 한국인들의 ‘동족애’는 ‘못 말린다’는 인상을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에게 심어줄 필요가 있다.

통일이 우리의 뜻대로 가능한지도 중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에서 찾아봐야 한다. 중국은 어느 계기에 한반도를 조선성(朝鮮省)으로 만드는 것이 꿈이다. ‘입염이 튼튼해야 이가 실하다’는 말은 저들의 오랜 민족정책에서 연유한다. 한반도의 변고(變故)시 조·중 동맹에 의해서가 아니고, 역사주권을 내세워 자동으로 개입하겠다는 책략이다. 이를 위해 중국은 미국과 밀거래를 할 수도 있다. 6자회담의 좋은 결실에 의해 한반도를 부득이 통일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경우에도 현 조·중 국경선(두만강과 압록강으로 된 지금 형태)은 확고히 지켜져야 한다는 게 중국의 생각이다.

필자는 중국이 이 같은 ‘한족적(漢族的) 국민국가의 성세(盛勢) 의식’을 지양해 주길 기대한다. 그 대신 유럽연합(EU)의 주도국 역할을 하고 있는 독일·프랑스의 현실정치에서 모범을 참조했으면 한다. 그래서 신(新)중화주의 정치가 EU 정치처럼 변해 갈 때 한(나중엔 통일한국)·중·일 3국의 공조가 제대로 작동하면서, 중국은 세계정치를 잘 이끌 것이다.

이런 점 등을 감안할 때 통일은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독일이 통일되기 휠씬 전인 1964년, 카를 야스퍼스는 “나누어져 있는 상태지만 동독의 우리 동포들이 얼마만큼 자유롭게 잘살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어려운 재통일보다 평화와 복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또 72년의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 당시 베너 내독성(우리의 통일부) 장관의 유명한 말이 있다. “통일호를 타려는 승객들이 정거장에 몰려오지만 통일호의 열차 발착표가 변경돼 열차는 오지 않습니다. 설령 늦게 오더라도 두세 정거장만 가면 선로(線路)가 뜯겨져서 차가 못 갑니다. 그러나 통일호의 종착역에 가려는 손님들께 방법은 하나 있습니다. 걸어서 가면 틀림없이 통일호의 종착역에 닿을 수 있습니다. 모두 걸어 갑시다”. 서독 통일정책의 요체를 한국은 유념해야 한다.

이태영 전 칭화대 중·한역사문화연구소 공동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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