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성 없어도 꼭 필요한 200종 출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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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호 22면

명저번역지원사업으로 번역 출간된 중국고중세사 이십이사차기.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한국연구재단(이사장 박찬모)은 1998년부터 ‘명저 번역 지원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동서양 명저를 체계적으로 번역해 보급하기 위해서다. 현재까지 총 200종의 동서양 명저가 본 사업 지원으로 출간됐다. 이 사업은 우리나라 번역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고 인문학 부흥의 전기를 마련하는 데 일조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 연구 재단 '명저번역지원사업'

번역 대상은 지금까지 번역되지 않았거나 오역·비문(非文)이 심한 동서양 명저다. 일본의 역서를 그대로 번역하여 뜻이 곡해된 경우도 해당된다. 일반인도 이해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우리말 번역으로 가독성(可讀性)을 높이고 상세한 역주를 기재해 학술 저서 번역의 모범을 학계에 제시하고 있다. 이 사업의 지원을 받은 대다수 역서는 학부와 대학원 강의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번역 업적과 능력이 우수한 연구자 중에서 ‘명저번역위원회’가 지정한 도서 363종의 범위 내에서 번역할 수 있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이 사업을 신청할 수 있다. 단독 또는 공동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선정된 연구자는 1~2년간 번역료(200자 원고지당 7000~1만2000원)를 지원받는다.

시장성은 없지만 반드시 번역되어야만 하는 동서양 명저가 한국연구재단의 ‘명저 번역 지원사업’을 통해 세상에 나오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에 번역 출간된 중국고중세사『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박한제 서울대 교수 역)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역주본이 출판된 적이 없는 역서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현대 중국어로 번역된 적이 없다.

정부의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되고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경우도 있다. 『명공서판청명집(名公書判淸明集)』(박영철 군산대 교수 역)과 『명사식화지교주(明史食貨志校注)/張廷玉(李洵校注)』(박원호 고려대 교수 역) 등이 대표적인 예다. ‘명저 번역 지원사업’으로 번역된 명저들은 베스트셀러라기보다는 꾸준히 판매되는 스테디셀러가 대부분이다.

『공간개념(Concepts of Space: The History of Theories of Space in Physics)』(이경직 백석대 교수 역)은 자연과학 분야에서 소홀하기 쉬운 역사적 고찰을 통해 현재 과학자들의 작업이 어떠한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또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잘 보여 주고 있어 자연과학 분야의 스테디셀러로 각광받고 있다. 자연과학 분야의 경우 출간된 지 10년만 지나도 더 이상 읽히지 않는다는 통념이 있다. 과학자들이 수시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응용하기 때문이다. 『공간개념』은 의미 있는 예외다.

이 외에도 『숲길(Holzwege)』(신상희 건국대 교수 역), 『명공서판청명집』『법철학(Rechtsphilosophie)』(김영환 한양대 교수 역), 『명사식화지교주』 등이 연구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교양도서로 사랑받고 있다. 앞으로 번역돼야 할 명저는 무궁무진하다. 앞으로 이 사업의 취지와 목적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한국연구재단을 포함해 정부·학계·언론계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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