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림서 추구하는 건 스스로 순환하며 생존하는 자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35호 14면

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이 서울 종로구 누하동 작업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도중 밝게 웃고 있다. 신인섭 기자

6일 오후 강석진(70) 전 GE코리아 회장을 만났다. 인왕산 끝자락에 위치한 종로구 누하동 작업실에서였다. 그는 전날까지만 해도 한국프레스센터 서울갤러리에 있었다. 여섯 번째 개인전(9월 18일~10월 5일) 때문이었다. 그는 인사를 마치자 명함을 두 장 건넸다. CEO컨설팅그룹 회장과 자신의 작품이 들어간 화가 명함이다. 강 회장은 20여 년간 GE코리아의 사장과 회장을 역임한 전문경영인이다. 동시에 여섯 번의 개인전과 100여 번의 그룹전·회원전을 연 중견 서양화가이기도 하다. 회장과 작가 중에 어떤 이름으로 불리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둘 다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강 회장이 GE코리아 사장으로 있을 때, 그림은 그의 창조적 경영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그의 기업 경영관과 예술관을 들어봤다.

여섯 번째 서양화 개인전, 강석진 전 GE코리아 회장

-기업경영과 미술은 전혀 다른 분야다. 어떻게 두 분야 모두 할 수 있었나.
“사실 경영과 미술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두 분야 모두 열정과 창조성, 그리고 프로의식이 필요하다. 월급을 받으니까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순한 정신 노동자일 뿐 진정한 경영자가 아니다. 자신의 일을 진정으로 좋아하는 열정이 필요하다. 예술도 마찬가지로 열정이 없다면 하기 힘든 것 아닌가. 두 번째는 창조성이다. GE코리아의 경영 모토가 바로 창조성이다. 창의적인 생각이 없으면 경영도, 예술도 성공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프로의식이다. 가끔 동료 기업인들이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듣고 ‘참 좋은 취미를 가지셨네요’라고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굉장히 서운하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아마추어로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붓을 든 이상 프로라고 생각한다. 경영도 마찬가지다. 경영자라면 냉정한 프로의식을 가져야 한다.”

-경영과 미술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두 가지 모두 어렵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모두에 흠뻑 빠져 살았기 때문에 한 번도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오히려 이성과 감성이라는 상반된 두 분야가 서로 보완하면서 시너지 효과가 많이 생긴 것 같다.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좋아서 수십 년간 CEO로 살았고, 그림이 좋아서 밤을 지새우며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두 번의 운명적인 만남이 지금 이렇게 화가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게 만들었다. 첫 번째는 30세 때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만난 화가다. 그때 나는 미국의 한 투자금융회사의 아시아지역 담당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매일 센트럴파크를 통해 출퇴근을 했는데 우연히 그곳에서 공원 풍경을 그리던 젊은 화가를 알게 됐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그린 적이 없었는데 그때 만난 거리의 화가와의 인연이 계기가 돼 이후 독학으로 그림을 시작하게 됐다. 두 번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만난 인연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하고 주말마다 교외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북한산으로 스케치를 하러 갔다가 지금은 작고한 차일두 화백을 만나게 됐다. 차 화백을 만나면서 잠시 사그라졌던 그림에 대한 열정이 다시 되살아났고, 기본기를 착실히 연마할 수 있었다.”

-작업실에 특이한 악기가 많다.
“그림을 그리다가 틈틈이 악기를 연주한다. 잠포니아(남미 전통악기) 같은 여러 나라의 전통악기가 많이 있다. 나는 풍경화를 그리지만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풍경만 그리진 않는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풍경이 머금고 있는 공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이 때문에 어떤 장소를 그리려면 그 나라, 그 지방의 정서에 푹 젖어야 한다. 그곳의 정서에 빠지면 비로소 그 풍경의 공기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이 음악이다. 그래서 여러 나라의 악기를 연주하고 작업실 한 편에 유럽부터 남미, 아프리카까지 각지의 음악 CD 수백 장을 모아두고 즐겨 듣는다.”

-작품을 보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부감(俯瞰) 구도가 많다. 이 같은 구도를 자주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수십 년 동안 세계를 무대로 기업을 경영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넓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게 됐다. 이러한 관점이 자연스럽게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구도로 그림에 반영된 것 같다. 두 번째 이유라면 나는 궁극적으로 작품을 통해 대자연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구도가 위에서 내려다 보는 시점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림에 표현된 것 같다. 특별히 의도하거나 계산해서 부감 구도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자연을 표현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런데 기업 CEO로 살면서 어찌 보면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첨단 기업을 만들었다. 직업과 작업의 역설이 흥미롭다.
“그렇다. 하지만 나는 궁극적으로 경영이나 예술 모두에서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 자연의 특성은 스스로 순환하면서 생존한다는 것이다. 회사 경영 역시 한 명의 CEO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스스로 자생하고 성장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실제로 GE코리아 사장 시절 매년 한 달씩 스케치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이때 CEO인 내가 없어도 회사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완벽한 체계를 만들었다.”

-서양화 기법을 쓰지만 작품의 내용은 동양화적 요소가 보인다.
“서양의 풍경화는 자연을 대상화해서 표현하는 데 비해 동양의 풍경화는 화가와 자연이 함께 어우러진다. 그런 점에서 내가 추구하는 풍경은 동양화적 요소가 있다. 나는 나와 풍경이 100% 공감대가 생기지 않으면 절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어떤 풍경을 마주했을 때 그곳의 자연에 붙잡혀 자리를 뜰 수 없을 만큼 숨막히는 순간이 있다. 그때 비로소 붓을 잡는다.”

-좋아하는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를 굉장히 좋아한다. 지금이야 최고의 대접을 받지만 생전엔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한 불행한 삶을 살았다. 시대를 너무 앞선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인생이 매력적인 것 같다. 또한 넓고 탁 트인 반 고흐 풍경화의 구도나 따뜻하고 정감 있는 색감이 나의 풍경화와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더욱 관심이 가는 화가다.”

-앞으로 작업 계획은. 화풍에 변화를 줄 생각은 없나.
“지금까지 작업해 왔던 화풍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화려한 기법을 사용하면 내 그림의 생명이 사라질 것 같다. 나의 목표는 순수한 자연의 공기를 표현하는 것인데 진실한 접근이 아닌 기법에 의존하는 순간 내 그림의 정체성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강석진
1939년 경북 상주 출생. 중앙대·연세대 대학원,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수료. 1981년부터 2002년까지 GE코리아 사장, 2002년에는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CEO컨설팅그룹 회장, 한국전문경영인학회 이사장, 서강대·이화여대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1995년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여섯번의 개인전과 100여 회에 이르는 그룹전·회원전을 열었다. 한·일 서양화 교류회 회장, 세계미술문화진흥회 이사장, 한국 신미술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신작전 미술회·영토회 회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