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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은 우리네 보자기 같은 것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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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근래에 국내 학계나 정계·경제계에서 화두로 등장한 개념 중 하나가 융합 혹은 통섭이라는 것이다. 학계에서 통섭은 “A가 B를 만나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 “김치 같은 발효식품처럼 화합물에 시간이 더해져 성숙한 결과물을 내는 것” 등으로 이해되고 있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합쳐져 무엇인가 새로운 결과물을 내는 방법이나 과정을 통섭이라 한다면 1990년대 초 세계적으로 밀어닥쳐 지금도 진행 중인 디지털 네트워크 혁명을 들 수 있다. 언어·비언어적 정보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인다. 픽셀과 같이 작은 것들이 모여 커다란 형상을 만들고 제 스스로 변화한다. 먹고 자고 일하고 놀고 소통하는 인간 생활의 개별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 간의 벽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시대에 이르러 통섭이 사회적 담론으로 등장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런데 통섭(consilience)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네 보자기를 그대로 닮아있다. 보자기는 싸는 물건의 형태와 크기에 따라 융통성을 부린다. 큰 것, 작은 것, 둥근 것, 네모난 것, 딱딱한 것, 부드러운 것 등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언제 어디서나 자유자재로 형태가 달라진다. 즉, 자기시스템에 맞지 않는 것까지도 수용한다. 어떤 것을 수용하느냐,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음식물 덮개, 책보, 수건, 강보(襁褓), 방석이 되어 물건 간의 소통마저 이루어낸다.

서양의 가방과 비교해 보면 보자기의 융통성은 극적이다. 내용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자기만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가방과 달리, 보자기는 ‘있음’에서 ‘없음’ 사이를 오고간다. 펴는 기능과 싸는 기능을 동시에 갖고 있어 융통성이 경직된 가방을 훨씬 뛰어넘는다. 기능적이고, 합리적이며, 로고스(logos)적인 가방을 비웃으며 부드러움 속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모양에서 있고(有) 없음(無)을 오고가는 도(tao·道)의 한 자락을 보는 듯하다

우리네 보자기는 이처럼 21세기 후기 산업사회의 임시 변통주의와 상응하는 가변적 다양성과 사물의 통합 기능을 지닌다. 다양성과 통합성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우리에게 생태적 풍요를 주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재활용 쓰레기는 글자 그대로 단순한 재활용(recycling)에 그쳐 결국 쓰레기로 남는다. 하나 보자기는 재활용성에도 뛰어난 융통성을 보인다. 쓰다 남은 재료를 재활용한 보자기는 보자기 자체의 재사용(reuse)적인 특성과 더불어 통합적·생태적 논리를 한 몸에 지니고 있다. 놀랍지 아니한가? 통섭의 논리가 바로 우리 한민족의 실생활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니.

허병기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