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능금나무 아래서 들녘을 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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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빨갛게 익은 능금나무 그늘에 서면 왠일인지 부끄럽기만 하다. 그처럼 나도 가을을 맞이해도 되는 것인지, 그처럼 나도 푸르른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는 것인지, 그처럼 떳떳하게 9월의 바람 앞에서 나도 알몸으로 누구나 껴안을 수 있는 것인지,가을에 향그러운 능금나무 그늘에 서면 자꾸 부끄러워만 지는 자신을 어찌할 수가 없다.

9월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9월의 하늘은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가. 9월의 햇살은, 9월의 바람은 또 얼마나 따사롭고 향기로운가. 그러니 그 9월을,가을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몸에 하나쯤 생채기가 있어야 한다. 한개쯤 굳은 살이 백혀 있어야 한다. 두뺨에서 한줄기 쯤 소금기가 묻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인가.

그렇게 멀리 있어 보이던 9월이 돌아왔다. 그렇게 멀리 있어 아주 오지 않을 것 같던 9월이 지금 돌아왔다. 먼 바다의 파도소리를 싣고, 먼 하늘의 별빛을 싣고, 먼 지평선의 무지개를 싣고……머얼리서 이기고 돌아온 사내처럼, 탕자처럼. 그러나 우리는 그를 맞아 왜 당당할 수 없는 것인가. 왜 함께 쓰러져 춤추고 뒹굴 수는 없는 것인가. 9월의 항구에서, 우리들의 향그러운 과원에서…….

지난 5월은 잔인하였다. 아닌 광풍은 천지에 몰아치고 비바람 끝 간데 모를 그 밤, 네 여린 가지 부러져 풋 열매 고스란히 떨어지던 그 밤, 번개의 칼날 앞에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네가 일어서던 그 밤, 나는 과연 무엇을 했던가. 창들 부서지는 소리에 불현듯 깨어나 오돌오돌 떨며 방만을 지키지 않았던가. 행여 내 서재의 난초가 다칠세라 끌어 안고 온 밤을 지새지 않았던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리기만 하지 않았던가.

지난 여름은 참으로 잔인하였다. 폭풍은 대지를 휩쓸고 표류하는 선박처럼 세상은 흔들렸다. 찢어진 하늘에서 내리는 폭우, 어둠을 제치고 달려드는 바람, 아, 그날도 나는 창문의 커튼을 닫아 내린 채 폭풍이 어서 빨리 자기만을 기다렸느니, 내 집의 침실과 내 방의 서가와 내 서가에 꽂힌 시집만이 비에 젖지 않기를 바랬었느니, 다음날 본 너의 모습은 참으로 가련하였다. 드러낸 뿌리는 간신히 밑둥만을 지탱하고 꺾인 줄기는 무심한 바람 속에 삐걱거렸다. 반나마 익은 채 땅위에 떨어져 뒹굴던 아, 아직은 풋냄새 나던 열매들, 그 순결한 모습들…….

나는 왜 뛰쳐나가 싸우지 못했던가. 나는 왜 그와 함께 차라리 쓰러지는 일을 택하지 않았던가. 나는 왜 시대와 맞서 울지 않았던가. 왜 나는 비록 작지만 거대한 뿌리가 되려고 하지 않았던가. 9월의 능금나무 그늘에 서면 부끄러워라. 지난 봄날이, 그리고 다시 찾아온 여름이…….

며칠만 더 햇빛을 받으면 익겠다,빨갛게 물드는 능금. 지난 5월의 광풍은, 지난 여름의 장마는 참으로 잔인하였다. 미친 비바람에 풋 열매 떨어지고 찢겨진 가지의 여린 잎사귀는 꽃잎처럼 흙탕물에 져 갔느니, 그 어두운 시대를 너는 용케도 견뎌냈구나. 그러나 대지에 뿌리 박고 사는 생명은 영원한 것, 너의 가을은 다시 새봄을 낳는다. 이제 다시는 피하지 않으리라. 닥치는 운명의 그늘을, 이제 다시는 피하지 않으리라. 대지의 부름을.

오세영 <시인.서울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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