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키워드로 본 CEO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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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짚고 더 높이 날아라." "사장님 어깨가 든든하네요." 종합광고대행사 ㈜한컴의 새내기 사원 임세인씨가 정이만 대표이사의 어깨 위로 뛰어오른다. CEO와 직원이 서로 믿고 따르는 직장문화라면 절로 신바람이 날 것이다. 기업의 앞날이 탄탄대로요, 밝게 빛나리란 것 역시 물으나 마나일 것이다. 권혁재 전문기자<shotgun@joongang.co.kr>

기업이라는 피라미드 조직의 정점에 있는 CEO. 사내 우두머리로서 전권을 행사하지만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너든 전문경영인이든 이에 따르는 책임과 고뇌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Week&은 ㈜누브티스와 공동으로 '행복한 CEO'회원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통해 CEO들의 실상을 살펴봤다.

*** 책임 - 자살 심정 이해간다

사내에서 늘상 큰 소리를 치는 듯 보이는 CEO들이 생각만큼 자유롭고 거칠 것 없는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CEO 중 65%가 "자살 충동을 느껴 본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자주 느낀다고 대답하는 CEO도 10% 가까웠다. 책임감 때문이다. 두 명 중 한 명은 자신의 임무나 책임이 무겁다고 느낀다고 답했다.

A유통 B사장(49)은 요즘도 한강 다리를 건널 때면 쓴웃음을 짓곤 한다. 얼마 전 저명인사들의 잇따른 한강 투신이 사회문제가 됐을 때 자신도 같은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음을 깨닫고 정신이 번쩍 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업실적은 곤두박질치고 막아야 할 어음은 줄지어 돌아오고…. 그 막막한 심정은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지도 않은 자신이 한강에 뛰어들기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단다. B사장은 투신할 용기를 되살려 회사 살리기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B사장 경우는 우리나라 CEO들에게 결코 드문 사례가 아니다.

*** 접대 - 피할 수 없는 폭탄주

중소 운송업체를 경영하는 이기복(43)사장은 하루 두번 점심 식사를 하기 예사다. 많을 때는 세번까지도 한다. 그런 날은 오전 11시30분에 이른 점심을 하고 오후 1시와 오후 2시30분쯤 또 다른 약속을 잡는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많고 시간은 없으니 도리가 없다.

"조금씩 먹는 시늉만 하지만 접대를 하다 보면 결국 과식 할 수밖에 없지요." 운동할 시간은 없고 먹기만 하니 느는 게 뱃살뿐이라며 이 사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래도 점심은 약과다. 일주일에 서너번씩 있는 저녁 약속은 문자 그대로 '사역'이다. 3,4차까지 이어지다 보면 새벽 2시를 넘기기 일쑤고 폭탄주 10여잔은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다. 술이 센 부하직원과 동행하지 않으면 그 이상도 각오해야 한다.

이 같은 업무용 술자리를 우리나라 CEO들은 주당 거의 네 번 가진다. 그리고 그 같은 술자리는 거의 3차까지 이어진다. 주말이라고 쉴 수도 없다. 우리나라 CEO 네 사람 중 한 사람은 토.일요일 하루도 못 쉰다.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은 겨우 한달에 하루나 이틀 쉴 수 있을 뿐이다.

*** 회의 - 하루 평균 2.4회

우리나라 CEO들은 하루평균 2.4번의 회의를 하고 회의시간은 일반적으로 두시간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예외도 있다. 해태제과 차석용(51)사장은 "한 시간이 넘는 회의는 안 함만 못하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결론이 안 나고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길어지는 게 회의지만 그럴수록 알맹이는 없고 군더더기만 붙게 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그가 주재하는 회의는 결코 한 시간을 넘기는 법이 없다. 회의가 공전할 때면 그는 가혹하리만큼 많은 질문을 던지며 의문을 제시한다. 누적 매출 1000억원이 넘은 인기 아이스크림 '호두 마루'의 이름을 놓고 차 사장과 브랜드 매니저가 벌인 수차례의 설전은 업계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많은 CEO들은 그러나 차 사장만큼 운이 좋지 않다.

*** 결단 - 피가 마른다

CEO는 의사결정을 하는 자리다. 결단을 위해 피말리는 고민이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정을 내려야 하기도 한다.

외식업체 태창가족의 김서기(45)사장의 경우가 좋은 예다. 그는 지난해 새로운 꼬치구이 전문점 브랜드를 만들면서 '화투'라는 이름을 붙였다. 김치를 자기들 음식이라고 우기는 일본이 미워서 일본의 대표적 놀이문화를 빼앗아오자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러나 주주들은 물론 대부분 직원들의 불 같은 반대에 부딪혔다. 화투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친근하고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강점을 들어 밀어붙였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1년 새 서울.경기 지역에서만 70개가 넘는 분점들이 문을 열었다.

샐러리맨 출신 CEO로 유명한 웅진식품 조운호(42)사장은 "사원 때는 CEO들이 너무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막상 이 자리에 오르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털어놓는다.

우리나라 CEO들은 이처럼 때로는 독단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결정을 하루 평균 네번 한다. 그 중 38%는 회사의 사활이 걸린 결단을 최소 일주일에 한번 이상 한다. 한달에 한번 이상 하는 CEO도 30%를 넘는다. 그러한 결정은 때론 잘못된 것일 수도 있어 60%가 넘는 CEO가 "자신이 내린 결정을 후회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훈범 기자<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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