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한국여성의 현주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동네 목욕탕에 갈 때 아내는 수건을 챙겨 가야 한다.

여탕에서는 돈 낼 때 수건을 두장씩만 내주기 때문이다.

바로 위층 남탕에선 수건을 쌓아놓고 마음대로 쓰게 하는데, 같은 돈을 받고 왜 여자들에겐 수건 장수를 제한하느냐고 관리인에게 따져물으니 여자들은 제한하지 않을 경우 열장이고 스무장이고 헤프게 쓰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엽전은 안돼" 하던 자기비하 콤플렉스에서 한국사회는 꽤 벗어났다.

그러나 '여자는 할 수 없어' 의식은 좀체 사라지지 않는다.

모처럼 장관직에 올랐다가 어처구니없는 허물로 물러서는 여류명사들, 남편의 신분을 옷장수 브로커 노릇을 위한 밑천 정도로 여기는 귀부인들을 볼 때 개개인의 잘잘못보다 여성의 전반적 사회의식수준을 생각하게 된다.

남녀평등은 선진국만의 자랑거리도 아니다.

에티오피아에서 몇년 전 독립해 아직도 전쟁에 시달리고 있는 에리트레아를 보자. 의회와 내각을 비롯해 모든 분야에서 여성은 남성동료들의 존중을 받으며 중요한 몫을 맡는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남성과 똑같이 징집받고 전투원으로 배치받는다.

30년 독립전쟁을 통해 확립된 전통이다.

독립전쟁 중 독립군 희생자 6만5천 가운데 3분의1이 여성전투원이었다고 한다.

멕시코시에서는 여성이 경찰 개혁의 선봉에 서고 있다.

대학총장 출신의 시경국장이 교통경찰관 비리를 없애기 위해 여경을 교통경찰대에 대거 투입하고 이들에게만 범칙금 부과의 권한을 맡겼다.

그후 운전자들의 뇌물풍속이 사라지고 있다니 여경들이 국장의 기대에 부응한 셈이다.

여경들이 부패의 관습을 청산할 수 있는 까닭은 뭘까. 여자가 원래 남자보다 도덕성이 높은 것일까. 여경들 자신도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늘 찬밥 신세라서 부패에 물들 기회도 없었던 여경들이 이번 개혁을 위상 향상의 기회로 보며 적극 호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선진국에서도 여성참정권 확립은 1차대전의 총력전 속에서 여성의 역할이 평가된 뒤의 일이다.

여성이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 큰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자신감을 가질 때 명실상부한 남녀평등이 가능할 것이다.

화성군청의 이장덕 (李長德) 씨 같은 훌륭한 여성 일꾼들이 우리 사회에도 있지만 그들에겐 씨랜드 참사를 막을 만한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대다수 여성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다.

이런 절름발이 사회를 고치지 않은 채 어쩌다 추태가 드러난 몇몇 사람을 흉보는 것도 부질없는 일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