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완주끝 실신 北조분희 남한 청년이 보살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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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분희 선수(左)와 자원봉사자 조상용씨가 어둠이 내린 아테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북한 여자 마라토너 조분희(25)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아테네 현지시간으로 22일 오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섭씨 35도의 더위에서 마라톤 평야 42.195㎞ 코스를 완주한 극한의 사투 뒤의 고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분희는 파나티나이코 스타디움의 결승선을 넘자마자 쓰러져 실신했다. 기록은 2시간55분54초. 88명이 출발해 22명이 기권하고, 66명이 완주한 아테네 올림픽 여자 마라톤 경기에서 조분희는 56위였다.

"기념 핀 하나 주시라요"

쓰러진 조분희에게 관중의 갈채가 쏟아졌다. 그러나 조분희의 곁에 북한팀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 기대주였던 함봉실이 중도에 기권하자 모두 그곳으로 달려갔기 때문이었다. 대회 관계자가 기절한 조분희를 들쳐업고 의무실로 달렸다. 북한팀 코치를 찾는 장내 방송이 계속 나왔으나 소식이 없었다. 경기진행 본부는 현장에 있던 한국인 자원봉사자 조상용(26)씨를 찾아냈다. 마라톤 결승점에 배치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조씨는 조분희의 옆에서 간호하기 시작했다. 30분쯤 흘렀을까. 링거를 맞고 있던 조분희가 조금씩 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누구…". "한국에서 온 자원봉사잡니다."

신세대 남남북녀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마침 성씨가 둘 다 조씨였다.

"오빠, 나도 핀 하나 주시라요." 조분희가 조씨의 신분증 카드 옆에 달린 한국선수단 핀을 달라고 했다. 놀란 건 조씨였다.

"이거 남한 건데 가져가도 돼요?"

"다른 친구들은 남조선 선수들한테 많이들 받았는데 나는 마라톤 선수라 남조선 선수를 못 만났시요."

외국 친구들이 달라고 해도 주지 않던 딱 하나 남은 핀이었지만 기꺼이 빼서 줬다. 자기가 한살 어리다며 스스럼없이 "오빠"라고 부르는 동생을 대하는 심정이었다.

링거 주사액이 다 들어갔을 때 간호사가 나타났다. 의사도 퇴근해 버렸단다. 그리고 선수촌행 셔틀버스 막차가 10분 뒤에 떠나니 어서 준비해 나오라고 했다.

부랴부랴 옷가지를 챙겨 버스를 탔다. 현지시간으로 오후 10시30분이었다. 스타디움에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훤하던 경기장의 불도 이미 꺼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경기장을 떠나는 조씨 남매(?)에게 경비 군인이 "굿 나잇"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정신을 차린 조분희는 셔틀버스 속에서 '수다쟁이'로 변했다.

"제주도에 가보고 싶다"

"남조선에서는 제주도에 꼭 가보고 싶습네다."

"나도 제주도에는 한 번도 못 가봤는데. 거기, 비싸서…."

이번엔 조분희가 놀랐다.

"북조선에는 돈 없어도 좋은 구경 많이 합니다. 오빠, 통일되면 묘향산 한번 와 보시라요. 내가 안내해 줄게요."

조분희는 "황영조 선수가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북조선도 난리가 났다. 나도 어릴 때 봤는데 '조선 사람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면서 "이번엔 이봉주 오빠가 꼭 우승해야 돼요"라고 말했다.

조분희는 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북한 방문부터 조씨의 고향인 부산까지 모르는 게 없었다.

"이봉주 오빠 꼭 우승해야"

끝내는 "남조선은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시끄럽지만 우리는 장군님이 너무 잘해 주십니다"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남북의 청춘들이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버스가 어느새 선수촌에 도착했다.

조씨가 "이제 끝났는데 뭐 할거냐"고 묻자 조분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어머니가 10등 안에 들지 못하면 집에 오지도 말라고 했시요"라고 웃은 뒤 "56등이 무슨 쉴 체면이 있습네까. 내일 새로운 전투가 시작됩니다"라며 다부지게 말했다. 언제일지 모를 다음 경기를 위해 다시 몸과 정신을 가다듬겠다는 말로 들렸다.

아테네=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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