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슬픈 열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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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남미 어떤 곳의 인디오들은 백인들을 잡아다가 물속에 처넣고 그들도 과연 죽고 썩는지를 며칠이고 감시하였다 한다. 백인은 신처럼 죽지 않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반대로 백인 정복자들은 인디오들이 짐승처럼 영혼을 갖지 않은 것 아닌가 의심했다. 특히 백인 선교사들은 인디오들에게 구원할 영혼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토의하기까지 했다. 뒷날 '슬픈 열대'를 연출해낸, 서로에 대한 무지의 조우(遭遇)였다.

분열·갈등 키우는 과거사 공방

얼마 전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 선친이 저지른 일이 빌미가 되어 과반수 의석을 가진 집권여당 대표가 현실정치에서 뼈저린 낙마(落馬)를 했다. 그 선친은 국제법적 합법성으로 포장된 한.일 합방조약 십여년 뒤에 태어났고, 해방이 되었을 때도 겨우 20대 후반의 젊은이였다. 일제가 세운 초등학교에 들어가 그뒤 10년이 넘도록 그들의 철저한 국민형성(國民形成) 교육 속에 자랐으며, 특히 그 청소년기 후반은 일제의 황민화(皇民化)정책이 마지막 발악을 하던 때였다.

그런데 이 아침신문은 또 다른 여당 중진 의원이 선친의 일제 시절 경력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음을 보도하고 있다. 아직은 선친의 소속기관뿐, 그 구체적 직위나 친일 행적이 밝혀지지는 않아도 과거 청산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한바탕 적잖은 논란이 일 듯하다. 정말이지, 우리가 어쩌다가 이런 참담한 시대에 살게 되었는가.

정부.여당은 입을 모아 과거사 청산에는 결코 연좌제 적용의 의도가 없다고 우기지만, 이제 그 연좌제적(的) 효과를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그 같은 잣대를 엄격히 적용하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연좌제적인 피해를 볼 것임도 불보듯 뻔하다. 아무리 가까워도 60년 전에 저질러진 윗대의 잘못으로 한창 뻗어나가던 현실의 정치인이 주저앉게 되는 어이없는 일이 21세기에 우리 사회에 잇따라 벌어질 판이다.

하지만 걱정은 가혹하면서도 불합리한 연좌제의 때늦은 부활이 아니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여야가 정치적 생명을 걸고 그런 공수(攻守)를 주고받는 사이에 확대 재생산될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 상처와 적의다.

기왕에도 우리 사회가 언제나 화합하고 일치해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대립과 반목의 양상이 지금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맞서고 있는 세력들의 서로에 대한 태도를 보면, 관용과 이해는 이미 사어(死語)가 되고 설득과 인내조차 쌍방 모두에게 진작부터 포기된 듯하다.

그러나 진실로 두려운 것은 갈수록 격화되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 누적되는 상처와 적의가 아니라 그것들이 길러내는 서로에 대한 무지다. 그 무지는 점차 서로에 대한 부정과 말살의 열정을 자극하고, 쉽게 폭력의 유혹에 빠지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삼자에게는 독선적이고도 무자비한 택일을 강요하게 되며, 마침내는 끔찍한 내전심리(內戰心理)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로 무지하면 폭력에 쉽게 유혹

정치적 이념이나 세계와 인생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려는 노력 대신 편견이나 주관적 단정으로 서로에 대한 무지를 길러가는 점에서, 우리 사회는 '슬픈 열대'를 닮아간다. 그 무지가 일시적 현상인지 비극적인 결말을 향한 과정인지는 알 수 없으되, 이왕 레비스트로스 틀을 빌려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이 불길한 사태에 대한 처방도 그에게서 찾아보자.

레비스트로스는 백인도 인디오도 서로에게 무지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상대를 짐승으로 의심했던 쪽보다는 신이 아닌가 의심했던 쪽이 더 인간답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와 같은 태도다. 우리가 빠져 있는 대립과 갈등이 어떠한 것이건, 상대가 영혼이 없는 짐승이라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된 게 아닐까 의심하기보다는, 더 우월한 정신과 고매한 인격으로 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슬기와 겸손을 길러보자.

이문열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