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95.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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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11장 조우

박봉환에겐 놓치고 싶지 않은 두 가지가 있었다. 그 첫째는 희숙이었다. 그녀는 서른 중반을 넘기도록 동가식서가숙으로 전전하던 그가 획득한 가장 성공적인 전리품이었다.

먼 여정에서 지친 몸으로 돌아 왔을 때, 그리고 벌여 놓은 일들이 완벽한 실패와 좌절로 끝나고 말았을 때, 마땅히 찾아갈 가정이 있다는 다행스러움에서 느끼는 짜릿한 정착의 쾌감과 그 장소가 제공하는 조촐한 단란함을 박봉환은 잊을 수 없었다.

여성에겐 여자와 아내라는 두 개의 모습이 조화있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도 희숙이었다. 걸핏하면 바가지를 긁어대거나 안달이었지만, 그것은 애성 바르고 영리한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남자와의 관계에서 한 번 실패한 상흔이 간직되어 있었으므로 남자를 언제 어떻게 쓰다듬고 닦달해야 한다는 지혜조차 특출한 편이었다.

제 손으로 세탁하지 않으면 언제나 쑤셔박아 놓은 그 자리에 볼썽 사납게 처박혀 있던 속옷 한가지라도 그녀의 맵짠 손길을 거치면 산뜻한 새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장 감동스러웠던 것은 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이튿날 아침, 그가 입었던 구질구질한 속옷과 양말들이 말끔하게 세탁되어 빨랫줄에 매달려 밝은 햇살 아래에서 나부끼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박봉환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도록 가정의 안락과 소중함을 느꼈었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과연 누가 양말짝 한가진들 그토록 소중하게 여길 수 있을까. 여자인 희숙으로선 당연시해서 습관적으로 치러내고 있는 자질구레한 일상사들이 박봉환의 시선에서 바라볼 때는 전혀 새롭고 신선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는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들, 너무나 보잘것이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바로 소중한 것이란 깨달음을 제공한 사람도 희숙이었다.

게다가 서울까지 나가서 거래처를 확보하는 장사 수완까지 발휘하고 있다면, 그의 결혼생활에 눈곱만치의 간극이나 앙금이 생겨선 안된다는 것이 박봉환의 생각이었다.

두번째는 바로 중국에서 터놓은 거래선, 안면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짧았던 기간이나마 신실한 안면을 터놓은 중개상들과의 약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때 입을 손실은 약속이 지켜졌을 때 얻어지는 잇속보다 훨씬 심각하고 참담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어떤 고통과 신산을 겪더라도 다음 파수에는 약속한 물량을 챙겨 중국으로 가져가야 했다. 그렇다면 한철규가 내비친 합작의 의향도 반드시 성사시켜야 했다.

그것을 성사시켰을 때, 모자라는 자본금을 충당해야할 고민거리가 일시에 해결되는 것은 물론이었고, 동업관계인 세 사람 중에서 주도권을 잡는 일까지도 넘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지난날의 그가 대수롭지 않게 저질러 왔던 과거의 그림자들과 임기응변으로 뇌까렸던 약속들이 느닷없이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배반하지 않겠다던 약속. 죽고 싶도록 보고 싶었다는 가벼운 거짓말. 이곳저곳 싸질러 다니면서 건네주었던 몇 천원짜리 금어치의 하잘 것 없는 선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언약들까지 너무나 짙은 그림자가 되어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박봉환에게는 임기응변에 불과했던 것이든 마지못해 한 약속이든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간직할 만한 진실이었음을 지나친 결과였다. 그런데 과거의 거짓과 방만 (放漫) 을 감추고 묻어버리자면 또다른 거짓을 연출해야 한다는 곤욕이 뒤따라야 했다.

희숙이가 기다리고 있는 다방으로 찾아 갔을 때 그녀는 예상했던대로 새파랗게 토라져 있었다. 반드시 만나기로 약속되었다고 호언했던 변씨를 이러저러해서 만나지 못했다고 둘러대는 말에 희숙도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

나선 김에 고흥까지 가자는 그녀의 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박봉환에게는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한철규와 단독으로 만난다면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겠지만, 고흥으로 내려 간다면 반드시 승희를 만나야할 것이었다. 고흥으로 간다는 것은 화약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만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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