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94.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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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제11장 조우 ⑧

사흘쯤은 여독을 풀고 쉬어야 한다는 권유를 뿌리치고 서울 갈 준비를 서둘렀다. 중국 옌지에서 통기만 기다리고 있을 태호의 조바심을 생각하면 여독을 핑계하고 노닥거릴 계제가 아니었다.

우선 서울로 나가서 희숙이가 터놓았다는 점포를 몸소 확인하고 물품을 중국으로 가져갈 경우의 잇속도 따져봐야 할 것이었다. 한철규가 제의한 합작은 그 다음에 결정할 일이었다. 손씨와 동행하는 것이 순서였으나 결국은 그들 부부만 떠나기로 낙착되고 말았다.

오후에 도착해서 남대문과 동대문의 점포를 둘러보았을 때 한철규가 보여준 열성을 지나쳐 볼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봉환이가 나서서 더 이상 가격을 내려칠 수 없을 수준까지의 헐값으로 흥정이 되어 있었다.

가진 돈으로 계약금을 지불하고 타워 건물이 우뚝 선 평화시장 근처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다. 지난번 한철규와 동행이었을 때 묵었던 여관으로 가자는 박봉환을 면박주어서 시설이 호텔 수준인 번듯한 여관을 찾은 것이었다.

박봉환의 의지대로 두었다면 여관은 고사하고 여인숙으로 찾아들었을 것이었다.

"보따리 장수 주제에 여관은 분수에 넘친다카이. 짚신에 국화를 그린다카디, 천장에 별 안보이면 됐지 주제넘게 호텔은 또 무신 호텔이고, 나는 그런데서 잠도 안온다카이. "

"자기 그럴거야 정말? 난 그런데서 못 자. 허술한데서 자다가 강도당하면 어쩔래?" "야가 또 바가지 긁어쌓네. 강도가 그렇게 겁나그든 청와대 정문 앞에서 노숙하지 왜. "

"자기 정말 자린고비 행세할 거야?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가 서울역 광장 가서 노숙해야 속 시원하겠어? 그 말이 진정이라면 노숙할게. " "분수 지키면서 근검절약하고 살자는 이바구지, 니 걸부새이 (거지) 맹글라꼬 이빨 앙다물고 설치는 사람은 아이라카이. 우리 살림 우리가 안 애끼고 살면 누가 애껴주겠노. "

"난 못해. 밥은 굶어도 좋지만 잠은 지저분한 데서 못 자는 성미라는 걸 자기도 알잖아. " 박봉환의 말이 옳았다. 5만원을 지불하고 찾아들어간 객실에서 곤하게 잠든 것은 불과 다섯시간도 못 되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주문진 가는 첫 버스를 탔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창호를 만날 수는 없었다. 박봉환을 난감하게 만든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끝내는 변씨의 집을 찾아갔을 때였다. 툇마루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고, 찌그러진 채로 방치한 문짝을 보면 오래전부터 사람이 거처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인적이라곤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집 처마에 제비 부부가 찾아와 집을 짓고 새끼를 치고 살고 있었다. 새끼들을 위해 벌레를 물어나르다가 머물고 있는 사람이 집 주인이 아닌 것을 발견하고 앞 전깃줄에 깝죽거리고 앉아 귀가 따갑도록 재재거리고 있었다.

빗자루를 내던지는 시늉을 하면 금세 사라졌다간 어느새 또 다시 날아와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툇마루에는 제비들이 안심하고 싸갈긴 제비똥들이 너절하게 흩어져 있었다.

아마도 일행을 따라 전라도 쪽으로 내려가 있든지, 늙은이 주제에 원양어선을 탔는지도 몰랐다. 이웃을 찾아다니며 행방을 물어보았으나 행방을 짐작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근처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희숙으로부터는 십분 간격을 두고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을 내동댕이쳐버리고 싶었지만 약속장소가 어긋났다고 둘러대고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영동식당을 찾아갔다.묵호댁을 찾아가면 변씨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영동식당 간판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막상 술청으로 얼굴을 디밀 배포가 없었다. 변씨의 행방이나 곱게 알려주고 말없이 돌아서 줄 여자가 아니란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식칼이라도 들고 쫓아온다면 박봉환의 애꿎은 인생은 시쳇말로 땡소리 났다고 봐야 옳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는 순간 박봉환은 안색이 파랗게 질려 뒤도 안 돌아보고 영동식당 골목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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