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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오프 더 레코드 (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7) 군정연장 선언

63년 3월 14일 저녁 정동 미 대사관저. 만찬이 시작되자 朴대통령과 버거 대사가 헤드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나와 김재춘 (金在春) 중앙정보부장, 김종오 (金鍾五) 육군참모총장, 멜로이 8군사령관, 하비브 미 대사관 정치담당 참사관, 킬렌 미 대외원조처 (USOM) 처장 등 양측 관계자들이 빙 둘러앉았다.

이날도 통역은 역시 조상호 (曺相鎬.전 체육부장관) 씨가 맡았다.

외교관례상 주재국 대통령이 자신의 관저가 아닌 일개 대사의 숙소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인지 버거 대사를 비롯한 미 대사관측 인사들은 이날 대통령을 모시고 만찬을 갖는다는 사실에 무척 고무돼 있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버거 대사는 환영사에서부터 朴대통령을 한껏 치켜세웠다.

"朴대통령이 민정이양을 선언하고 군 복귀를 결심했으니 역사상 이처럼 위대한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 환영사를 마친 버거 대사는 '대통령을 위한 건배' 를 제의한 뒤 朴대통령에게 '한말씀 하시라' 고 권했다.

그러자 朴대통령은 술 한잔을 입에 탁 털어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버거 대사, 할 말이 있으니 조용한 데로 갑시다" 하며 버거 대사의 소매를 붙잡고 출입구 쪽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돌출행동으로 만찬장엔 일순 긴장감이 감돌았다.

특히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버거 대사는 몹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버거 대사가 "여기서 얘기하면 안되겠느냐" 고 했지만 朴대통령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버거 대사가 찾아간 '조용한 곳' 은 다름아닌 자신의 침실이었다.

朴대통령의 뒤를 따라 조상호 통역관과 하비브 참사관이 들어갔다.

나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침실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한 시간이 족히 지났을 무렵, 벌겋게 상기된 하비브가 문 밖으로 나오더니 내게 화를 버럭 내는 것이었다.

당시 그와 나는 속을 터놓고 얘기할 정도로 친한 친구 사이였다.

"동원! 자네가 알았으면 내게 귀띔이라도 해줘야지. 왜 하필 미국 대사관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만들어? 버거 대사는 이제 갔다 갔어…. " 하비브는 자신의 목을 손으로 베는 시늉까지 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필립!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며 정색을 하고 묻자 그제서야 그는 내가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비브가 전해준 朴대통령의 발언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朴대통령이 버거 대사에게 군정을 4년간 연장하겠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동원! 朴대통령이 군정 연장 선언을 왜 하필 여기서 하느냐 말이야. 오늘 여기서 만찬을 한다는 사실이 한국 언론에 다 보도됐고 관저 밖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과 미국이 짜고 한다는 식의 얘기가 나올테고…이러다 미국이 군정 연장을 사주했다고 소문나면 어떡할 거냐고?" 하비브는 다시 버거 대사의 침실로 들어갔고 대화는 얼마간 계속됐다.

마침내 상기된 얼굴의 朴대통령이 침실에서 나왔다.

방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던 나를 보더니 "李실장, 다른 분들과 함께 장충동 공관으로 오시오" 하고는 총총히 대사관저를 떠났다.

나는 '장충동으로 오라' 는 대통령의 말을 무시하고 서대문 집으로 돌아와버렸다.

명색이 비서실장인데 이토록 중대한 사안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니 정리가 되는 대로 사표를 던지기로 결심했다.

그렇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의 신상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저런 식으로 가면 정권 자체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 내가 미국 친구들한테 듣기로는 61년 방미때 '조속한 민정이양' 을 먼저 약속한 쪽은 朴대통령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군정을 종식할 수 있느냐" 고 의문을 표시하자 朴대통령은 "그러니 쿠데타 아니냐. 민정이양도 쿠데타 식으로 하겠다" 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글= 이동원 전 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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