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50년만에 지킨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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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구한말 (舊韓末) 우리나라를 찾아온 서양인들 가운데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하다.

교사.역사학자.출판인으로 다채로운 활동을 벌였던 그는 한국에 대해 지극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 던 헐버트는 죽어서 서울 한강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다트머스대학과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한 헐버트는 23세 때인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특권층 자제들이 대부분인 학생들의 낮은 학습의욕에 실망한 헐버트는 1891년 귀국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한국관련 집필활동을 계속하다가 1893년 한국에 돌아왔다.

출판인으로 전신 (轉身) 한 헐버트는 각종 교과서를 출판하는 한편 1901년 월간지 '코리아 리뷰' 를 창간했다.

'코리아 리뷰' 는 특히 일본의 한국에 대한 불법적인 침략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고종은 헐버트의 용기있는 행동에 감명받고 그를 깊이 신임했다.

1905년 일본이 을사조약 체결을 강요하자 고종은 헐버트를 비밀리에 미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헐버트가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라 고종의 밀서 (密書) 는 무효가 됐다.

이듬해 6월 서울에 돌아온 헐버트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의 나라 한국의 몰락을 서술한 역사책 '한국의 멸망 (The Passing of Korea)' 을 썼다.

1907년 고종은 헐버트에게 다시 한번 임무를 부여했다.

그해 6월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앞서 헐버트로 하여금 유럽 각국을 순방하면서 일본의 한국 지배가 부당함을 널리 알리도록 한 것이다.

결과는 실패였고, 헐버트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한국은 헐버트를 잊지 않았다.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1949년 여름 헐버트를 초청했다.

그러나 노령에 무리한 선상 (船上) 여행으로 병을 얻어 한국 도착 1주일만인 8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사회장을 치렀으며, 이듬해 3.1절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했다.

어제 헐버트 50주기 (周忌) 를 맞아 뜻깊은 행사가 있었다.

당시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은 헐버트의 묘비명 (墓碑銘) 을 써주기로 약속했으나, 이를 지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동안 묘비 한 가운데가 공백으로 남아 있던 것을 이번에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글씨로 메운 것이다.

50년 묵은 약속을 지킨 흐뭇함과 함께 한국인의 영원한 친구인 헐버트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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