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작품집 『안녕, 엘레나』 펴낸 소설가 김인숙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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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소설가 김인숙씨는 “질투를 느낄 정도로 잘 쓰는 후배작가들이 있다. 그들로부터 자극을 받는다” 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소설가 김인숙(46)씨가 소설집 『안녕, 엘레나』(창비)를 펴냈다. 작품집으로는 여섯 번째, 장편을 포함하면 열일곱 번째 ‘소설’이다. 황순문학상 최종심에 올랐던 ‘조동옥, 파비안느’(2006년), ‘숨-악몽’(2008년) 등 2005년부터 쓴 7편의 단편을 묶었다.

스무 살이던 대학 1학년(1983년) 때 등단, 작가생활 27년째인 김씨는 한때 ‘참여형’ 작가였다. 80년대 그는 ‘서울의 봄’을 배경으로 한 장편 『‘79∼’80 겨울에서 봄 사이』 등 뜨거운 작품들을 썼다. 90년대에는 80년대를 곱씹는 후일담류를 발표했다.

소설집은 이전의 뜨거움과는 거리가 있다. 추석 다음날인 4일 그를 만났다. 김씨는 대뜸 “(작가가 된 후)한 해도 단편을 쓰지 않은 해는 없다. 그냥 흘러가는 거지 이번 작품집이라고 이전 작품집과 크게 다를 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 ‘흘러가는’ 김씨의 관심 목록은 아버지, 농담, 말의 불완전성에 대한 관찰 같은 것들로 채워진다. 소설집 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우선 아버지. 소설속 아버지들은 대개 능력이 없다. 거듭되는 실패로 말미암아 의욕도 없어진 경쟁 사회의 낙오자들이다. 분을 삭이지 못한 아버지, 느닷없이 어머니를 구타하는 등 (’안녕, 엘레나’) 불행한 가정사의 씨앗이 되기 일쑤다.

고통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가 말로써 위안을 얻는 것일 텐데 말 또한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무사가 칼을 쓰거나 숙수(熟手)가 회를 뜨듯, 말이 더도 덜도 말고 정확하고 온전하게 뜻하는 바를 전달한다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말은 대부분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안녕, 엘레나’나 ‘숨-악몽’ 등에는 “미안하단 말을 못한다고 해서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거나 “마음으로 안되면, 다행히 말이란 게 있으니, 말로써 용서한다 해라”라는 문장이 나온다. 타이밍을 놓치고 미처 말해지지 못함으로써 말이 속마음을 전달하는 데 실패하거나, 정반대로 번지르르하게 진심을 가리는 포장의 도구로 쓰이는 경우다.

말이 실패한 자리를 농담이 대신한다. 이때 농담은 “말따먹기 장난에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것이다. 눈물 나는 작품인 ‘조동옥, 파비안느’는 가난과 모욕으로 점철된 인생을 농담으로 견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다.

시골 초등학교 선생의 딸로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어머니 조동옥은 지리멸렬한 아버지가 집을 나가자 열여섯 살 딸 경애를 남겨두고 브라질로 떠난다. 그곳에서 파비안느로 살아간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경애에게 어느날 어머니의 사망을 전하는 포르투갈어 편지가 날아든다. 편지에 따르면 브라질인 두 번째 남편은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를 “개잡년”이라고 표현해 브라질인들을 배꼽 잡게, 한인들을 당황케 한다. 생전 어머니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스스로를 “개잡년”이라 부르며 이국의 한을 달랬던 것이다.

인생의 힘이 되는 슬픈 웃음. 뜨거웠던 김씨의 요즘 관심사다.

신준봉 기자 ,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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