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돈 세탁소' 케이맨군도 FBI서 탈세꼬리 잡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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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불법 자금 세탁으로 유명한 영국령 케이맨군도에서 벌어지는 검은 거래의 이면이 드러났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지는 미 연방수사국 (FBI) 과 국세청 (IRS) 이 2년간의 수사끝에 케이맨군도의 한 유령은행이 3억달러의 미국 자금을 빼돌리고 세금을 포탈한 사실을 밝혀냈다고 3일 보도했다.

FBI는 이번 수사에서 케이맨군도 금융기관들 사이에 통용되는 비밀 소프트웨어의 암호를 해독해내는 개가를 올렸다.

IRS도 "불법자금을 추적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잡게 됐다" 며 "조세피난처와 관계있는 미국은행들의 불법행위를 끝까지 추적해 세금을 물리겠다" 고 선언했다.

카리브해 연안의 작은 섬인 케이맨군도는 세금을 거의 물리지 않아 대표적인 조세피난처로 불리며 런던.뉴욕 등에 이어 세계 5대 금융중심지로 부상할 만큼 영업이 급팽창해 왔다.

뉴욕 타임스에 따르면 FBI는 케이블TV 프로그램 저작권 침해 혐의를 받던 매튜슨 (71) 을 체포했으며, 매튜슨은 자신이 운영했던 케이맨군도 은행의 불법거래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는 것. 미국 법원은 매튜슨의 정보제공 사실을 감안해 그에게 징역 5년형 대신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FBI에 따르면 지난 96년 세워진 매튜슨의 은행은 그동안 미국 부유층으로부터 3억달러 이상의 예금을 유치하고 세금포탈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유명의사인 제프리 라비뉴 박사가 18만달러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붙잡혔으며 뉴저지의 부호인 마크 비시니가 2백만달러, 오마하의 압보우드가문 (家門) 이 2천7백만달러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로 각각 체포됐다.

미 수사당국은 매튜슨 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을 앞으로도 계속 기소할 방침이어서 미국판 세풍 (稅風) 은 한층 거세질 전망이다.

FBI는 매튜슨에게서 케이맨 현지의 금융거래 명세가 적힌 암호화된 비밀 소프트웨어를 확보하고 케이맨 당국과 공조수사를 요구했으나 케이맨당국이 오히려 미국 수사당국에 접근해 이 자료를 빼돌리려고 시도했다고 폭로했다.

FBI는 독자적인 수사로 18개월만에 암호를 모두 해독해냈으며, "조세피난처의 생명줄인 보안망이 뚫린 이상 앞으로 자금세탁은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될 것" 이라고 자신했다.

케이맨군도는 비밀거래를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만의 고유 암호를 사용하는 법률까지 만들어 미국.유럽 수사당국의 추적을 교묘히 피해왔다.

이철호 기자

◇ 조세피난처 (tax haven) 란=법인세.개인소득세를 전혀 물리지 않거나 극히 낮은 세율을 부과하며 회사설립.외국환 업무에 대한 규제가 거의 없는 지역을 말한다.

현재 은행.보험 관련 다국적기업들은 조세피난처에 자회사를 설립, 자금을 빼돌리고 탈세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죄조직의 자금도 대부분 이곳에서 세탁을 거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의 조사에 따르면 97년 말 기준으로 조세피난처에 몰린 돈은 약 1조달러. 하지만 조세피난처가 탈세의 근거지로 지목되고 세계적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평가되는 헤지펀드들의 활동무대가 되면서 규제론도 최근 힘을 얻고 있다.

OECD는 47개 지역을 조사 중이며 오는 10월까지 조세피난처 명단을 발표할 계획이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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