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83.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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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제10장 대박

다방을 나섰으나 모텔이 위치한 길 쪽으로 선뜻 발걸음이 내키지 않았다. 등 돌린 여자의 꽁무니를 뒤쫓고 있는 자신의 누추하고 수치스런 모습이 거울로 비춰지고 있는 것처럼 눈앞에 어른거렸다. 등뒤로부터 신경질적으로 다방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애송이 레지는 문밖의 변씨가 들으라 하고 쏘아붙였다. 재수없는 꼰대야 씨발. 모멸감으로 온 삭신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것이든 낯선 것이든 도대체 두려울 게 없었고, 어떤 위기가 닥쳐도 몸뚱이 하나로 부딪쳤던 서울 시절이 몸서리치게 그리웠다. 다방 문앞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고 담배 한 대를 태운 그는 비로소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행을 할지도 몰랐다. 지금쯤 애송이가 차순진의 숙소로 전화를 걸고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통속들인 이상 그만한 배려쯤은 사양하지 않을 것이었다. 낯 익은 청년이 접수대 앞에 내놓은 낡은 소파에 목덜미를 기댄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어섯눈을 뜨는 그에게 다짜고짜 만원짜리 다섯 장을 찔러주었다. 청년은 구레나룻을 깡그리 밀어버린 변씨를 가까스로 알아보았다. 304호실 도어를 열 수 있는 마스터 키를 건네 받고 붉은 색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옆구리에 찔러 둔 식칼을 확인했다. 방 앞에 당도해서 도어를 두드렸다. 금방 누구냐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애송이가 경고전화를 걸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남자든 여자든 그토록 또렷한 목소리로 깨어 있을 시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찾아온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최소한 집을 지키고 있었다면, 식칼을 품지는 않았으리라. 변창호라는 이름을 댔다. 문은 열렸고 팬티만 입은 젊은 사내가 문을 열었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나 아무런 수작도 건네지 않았다. 누구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사내는 아무런 두려움이나 경계심도 없이 문을 열어준 뒤 자기 먼저 방안으로 돌아섰다. 사내의 체구는 깡마른 편이었고, 키 꼴은 박봉환의 대중이었다. 얼른 보아선 아무런 특징도 찾아볼 수 없는 사내였다.

그는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앞으로 벌어질 방안의 북새통이 자못 궁금하다는 듯 변씨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차순진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일찌감치 깨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는 상반신은 드러낸 채 하반신만 홑이불 자락으로 감고 있었다. 그녀가 담배를 비벼 껐다.

"집으로 가. " 가파르게 끓어 오르는 호흡을 고치며 변씨는 예사스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차순진의 시선이 힐끗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났다.

그리고 시큰둥하게 뇌까렸다. "참…. 집이 어딘 데 가자는 건지 모르겠네. " "잠깐 동안이었지만, 니가 살던 집을 몰라서 묻나?" "거길 집이라고 생각했으면, 거기서 잤지 하필이면 숙박료 드는 여관에서 잤을까…. "

"거기를 집으로 생각하자는 약속이 없었나?" "약속했다는 문서라도 있으면 어디 보여줘 봐요. " "니 때문에 치른 내 희생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그녀의 희고 긴 팔이 홑이불 속을 벗어났다. 그리고 담뱃갑을 끌어당기며 싸늘한 시선으로 변씨를 일별했다. 차디찬 시선에서 그녀를 설복시킬 수 없다는 좌절이 느껴졌다.

"노인네가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 됐지, 희생은 또 무슨 희생을 치렀다고 떠들어요?" "개 같은 년. 떠들고 있다니. " 그때까지 팔짱을 끼고 서있는 젊은이에겐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변씨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는 순간, 차순진 마담의 시선이 힐끗 젊은이의 이마를 스쳤다. 그의 개입을 채근하는 눈길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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