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우리도 '사람'을 찾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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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사람들은 만나면 '후3金시대' 를 개탄한다. 얼마전 40대 초반 정치학자와 한담을 하면서 내가 "청년 때부터 듣기 시작했던 3金이라는 말을 지금껏 들어야 하니 너무 지겹다" 고 토로했다.

그 정치학자가 손을 저으며 "지겹기는 우리가 더 하죠. 나는 두살 때부터 들어왔으니 지겹다는 말도 지겨워요" 라고 응답했다. 지겨운 3金시대를 이제는 마감하는가 했더니 왠 '후3金' 까지 등장하는가. 우리에겐 3金을 극복할 지도자가 그토록 없는가.

어째서 우리는 3金의 덫에 빠져 지겹고도 암담한 정치현실에 냉소적이고 대안 없는 비판만을 하게 됐는가.

21세기도 3金과 함께 가야 하는가. 정치를 남의 일로 보는 일반인도 이런 회의에 깊이 빠져들 만큼 우리는 3金의 포로가 돼 있다.

며칠 전 홍사덕 (洪思德) 의원이 한 신문에 기고를 했다. 방학이면 청소년들과 여름 밤 대화를 갖는다는 洪의원은 청소년들이 보는 3김관 (觀) 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 멋대가리가 없다는 것이다. 내각제 약속을 물리기로 했다면 좀 더 폼나게 대통령과 총리가 TV 앞에 나와 경제와 남북관계가 이러저러 하니 국민과의 약속을 물릴 수밖에 없다는 양해를 구하는 멋을 부릴 줄 알아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겐 꿈이 없다는 것이다. 공동정권.지역정당구조의 폐단에 대한 숨김없는 반성과 회한 (悔恨) 위에서 정권연장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21세기의 꿈을 실은 메시지를 보내야 할 터인데도 그들에겐 이런 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겁이 없다는 것이다.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고 늘 대도 (大道) 를 걷겠다고 하면서 백성과 천도 (天道) 를 겁내지 않는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생각을 홍사덕 식으로 윤색했는지 그들의 솔직한 의견 그대로인지는 몰라도 청소년들이 보는 3金도 일반인들의 3金과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지금의 젊은이들이 보지 못한 게 있다. 지금은 지겨운 3金이지만 한때는 국민에게 멋과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3金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서울대 문리대의 동숭동 시절, 청년 JP가 넓은 강의실에 등장해 대학생들과 민족적 민족주의가 무엇인가를 설파했을 때 그의 이론과 주장과는 별개로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과 젊은 정치인의 멋을 보았다.

72년 대선때 장충단 언덕배기에 모인 수많은 청중들은 군사독재에 맞서는 DJ의 패기에 찬 모습과 민주화를 향한 끝없는 열망에 감복하기도 했다.

민주화투쟁 시위 도중 경찰의 '닭장' 차에 연행되면서 티없이 맑은 얼굴에 웃음띤 YS의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던 한때가 있었다.

70고령의 노정객들에게 40대의 초심 (初心) 과 희망과 멋을 요구하기엔 세월이 너무 흘렀다. 30년 3金시대를 구가하면서 자신들의 대를 이을 새 3金을 키우지 못한 그들의 정치적 독점.독식주의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의회민주주의의 산실인 영국인들 41세의 젊은이가 노동당 당수로 뽑히고 또 그가 44세의 나이로 18년 동안 대영제국을 이끈 보수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총리가 되리라 누가 일찌감치 예측했을 것인가.

그의 비범한 지혜와 판단력, 그리고 겸손함이 오늘의 총리가 되기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하지만 오늘의 그를 총리로 이끈 견인력은 뭔가 달라져야 한다는 영국인들의 변화의 욕구 탓이었다고 본다.

이 변화의 욕구를 언론이 밀고 국민들이 지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멋과 꿈, 그리고 21세기를 주도할 신념의 새 지도자를 찾는 게 우리들의 소망이라면, 역할과 기능이 끝나가는 노정객들을 비난하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토니 블레어를 찾아 나서야 한다.

비장의 '깜짝 놀랄 인물' 을 대선 임박해 내놓아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깜짝쇼를 벌이자는 게 아니다.

여야 모두 잔머리 굴려 의석수 늘리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당대표쯤 되는 자리에 깜짝놀랄 인물을 영입해 변화의 새 정치를 치고 나가자는 것이다.

새 시대 새 정치를 이끌 잠재력 있는 정치인을 앞세워 총선을 치르고 3년여 남은 대선 후보로 밀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언론이 검증하고 국민이 심판해 희망의 새 정치를 열자는 제안이다.

임기말 내각제니 밀실 흥정 같은 꼼수로 정권을 연장하려들지 말라. 지겨운 3金이 국민을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할 일은 우리의 토니 블레어를 찾아 그들을 밀어주는 것이다.

"보라! 선거 한번 잘 치르면 세상이 달라진다" 는 블레어 신화를 우리도 만들어내야 한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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