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중국 합의 위반 묵인한 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중국이 외교부 홈페이지의 고구려사 원상회복을 거부했음에도 한국이 이를 수용, 지난 몇 개월간 문제가 됐던 중국의 역사 왜곡 파동이 일단락됐다.

한.중 양국은 23~24일 마라톤 협상 끝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 해결을 위한 '5개 구두 양해사항'에 합의했다. 요지는 "고구려사 문제를 정치문제화하지 않고 학술 차원에서 해결한다"는 것이다.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한국사를 삭제한 것에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고구려사를 정치문제화하지 않는다는 똑 같은 내용에 한국과 중국이 합의한 것은 지난 2월. 합의한 지 두달 만에 중국은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한국사를 삭제해 버렸다. 합의를 깬 것이다. 그런데도 '중국 외교부 홈페이지 원상회복'은 생략한 채 원점으로 돌아가 중국의 합의 위반만 묵인한 꼴이 됐다.

외교부 당국자는 "네번째 합의(표 참조)는 중국 정부가 내년에 교과서 왜곡을 하지 않으며, 중앙 정부 차원에서 교과서와 출판물에서 더 이상의 왜곡은 하지 않을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조차 공식 양해사항은 아니다. '한국이 그렇게 해석하고 발표한다'는 뜻이다.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아시아 담당 부부장(차관급)은 20일 취임하자마자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통보했다. 22일 저녁 서울에 온 우 부부장은 23일 오전 10시30분 최영진 차관과 만나 1시간20여분 동안 회담을 했다. 오후 2시30분에는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을 20분간 만났고, 오후 3시30분에는 이종석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과 만나 1시간30분가량 대화를 나눴다. 그러나 이때까지 아무런 합의점도 찾지 못했다.

이날 오후 7시30분. 시내 모처에서 양측 협상 실무팀이 만찬을 겸해 한자리에 앉았다. 한국 측에선 최영진 외교부 차관, 박준우 아태국장, 전태동 동북아2과장이 참석했다. 중국 측에선 우 부부장과 쿵쉬안유(孔鉉佑) 외교부 한반도담당 부국장, 리빈(李濱) 주한 중국대사 등이 왔다. 이 자리에서도 중국 측은 무리한 논리를 전개했다.

중국 측은 새로운 이슈를 제기했다. "한국에서도 동북3성 지방의 영토.국경문제에 대해 우려할 만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 관련 기관이 발행한 책자에 '만주에 진입, 진주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으니 이 문제도 같이 다루자"고도 했다. 초점을 흐리려는 전략이다. 그러면서 홈페이지 원상복구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곡 의도가 없다. 그런 상황이 발생한 데 대해 유념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때문에 "고성이 오갈 정도로 분위기가 험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중국 관영 언론과 지방 정부가 고구려를 중국사라고 왜곡하고 홍보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앞으로 안 하겠다"는 구두약속만 했다. 이 대목을 합의문에 넣자는 한국 측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외교부 당국자는 24일 "중국이 홈페이지를 복원하지 않겠다면 강제할 방법이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교과서 왜곡 등에서 양보를 받아내는 협상카드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안성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