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그린스펀식 화법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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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주 금요일의 주가폭락 사태는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 경제의 성장기반이 아직 취약한 상태며, 실물경제의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금융부문의 안정이 절대로 긴요함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위기에 있어 금리정책 논쟁이 하나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나 짚어보아야 한다. 그동안 공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

이러한 주장은 소비급증으로 경기가 과열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주가가 과대평가돼 있다는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특히 높은 경제성장률에 주목한 학자와 일부 정책당국자들은 금리인상을 앞당김으로써 예상되는 물가불안을 하루빨리 제어해야 한다는 '선제적 금리정책' 까지 주장했다.

무릇 정부의 경제정책은 시장 메커니즘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정책비용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좋은 정책이란 최소한의 정책비용으로 최대한의 정책목표를 달성하는 것인데 이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과다처방은 정책비용을 늘리고, 과소처방은 정책효과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책당국자들은 공시효과 (announcement effect) 를 통해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교란을 최소화하면서 시장의 자율조정 기능만을 통해 정책목표의 성과를 극대화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이러한 공시효과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사례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이 자주 거론된다. 그린스펀 의장의 말 한마디는 미국은 물론 국제금융시장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의 발언이 매우 신중하면서도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 않아 시장참가자들로부터 커다란 신뢰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종종 사용하는 방법은 "…한다면,…한다" 라는 경고 메시지를 시장에 전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최근 그는 "미국 경제성장률이 현재와 같이 높게 지속되면 잠재성장률을 초과해 인플레 우려가 커지므로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다" 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러한 발언은 경제 주체들간에 금리상승 기대감을 낳아 소비나 지출을 줄이도록 유도함으로써 현재의 다소 과열된 경제활동을 냉각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선제적 금리정책도 그런 맥락에서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은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 우선 이같은 주장이 "…이 예상되므로 또는…이 될 것이므로,…해야 한다" 라는 단정적인 형식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린스펀의 조건적인 정책변화 시사 발언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더욱이 오늘날 경제예측이 잘 들어맞지 않고, 우리 경제가 구조조정을 이행하는 비정상적인 과정에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를 간과한 채 통상적인 경기판단에 기초한 단정적인 형식의 발언이 남발된다면 시장참가자들의 불안심리를 증폭시킴으로써 시장의 과민반응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시장참가자들의 정책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져 정책당국의 공시효과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다.

또 한가지 우리가 특별히 유념해야 할 것은 이른바 디지털 경제의 심화로 거시경제 정책의 여건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전이 가속화됨으로써 정보의 유통범위가 국경을 초월해 광범위해지고, 그 영향력이 연쇄적으로 확산되며, 거시경제의 조정이 순간적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미래의 결과예측' 이 매우 불확실하고 정책실패 가능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피터 드러커는 일찍이 경제의 세계화와 정보화에 의해 80년대부터 가격조절 정책의 유효성이 상실된 지 오래라고 갈파했다.

그는 단기적인 '날씨 (경기상황)' 를 바꾸려는 노력보다 중장기적인 '기후 (경제여건)' 를 개선하는 데 주력하라고 주장한다.

우리 경제가 장기적으로 경기회복 기조를 실현해 나가기 위해서는 비생산적인 경기대책 논의보다 현재의 경기회복 양상을 지속해 나갈 수 있는 제반 경제여건을 개선하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구조조정의 신속한 마무리, 디지털 시대에 대비한 시장 인프라 정비와 같은 정책구상과 추진이 지금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보다 절실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정순원 <현대경제연구원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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