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3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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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36) 장군 박정희

박정희 (朴正熙) 장군과 나는 5.16이 나던 그때까지 15년 동안 군 생활을 했지만 단 한번도 같은 부대에 근무한 적이 없다.

군문에 들어온 시기가 서로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朴장군은 원래 정일권 (丁一權).이한림 장군 등과 같은 만주군 출신인데 46년 9월에야 조선경비사관학교 (육사 전신) 2기생으로 입교하는 등 그들보다 출발이 훨씬 늦었다.

만주에서 해방을 맞아 귀국이 뒤졌고 귀국해서는 또 고향인 경북 선산 (善山)에 가 몇달 쉬었던 탓이다.

나이는 朴장군이 1917년생으로 나보다 다섯살 위였다.

나는 '장교 박정희' 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해방 전 만주군에 복무하면서 실전경험까지 갖춘, 당시로선 보기드문 실력파였다.

특히 전술.전략 분야에 조예가 깊다고 평이 나있었다.

朴장군은 청렴결백한 장교였다.

내 처남 김웅수 장군은 朴장군과 6군단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때 겪은 朴장군을 두고 늘 '매우 강직하고 청렴한 사람' 이라며 칭찬을 하곤 했다.

60년 朴장군이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가게 된 것도 金장군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육군본부에서는 가끔 장교들의 부부동반 모임을 갖곤 했다.

그런데 朴장군은 좀체 부인과 함께 참석하는 일이 없었다.

내 아내 (김효수) 말에 따르면 고급장교 부인들이 육영수 (陸英修) 여사를 처음 대면한 건 60년 초, 밴플리트 장군 부인 환영연 자리에서였다고 한다.

이날 환영연은 서울 퇴계로에 있는 '한국의 집' 에서 열렸는데 엷은 옥색 한복에 구슬핸드백을 든 陸여사는 처음 대하는 장군 부인들에게 "제가 박정희 장군 처입니다" 라고 깍듯이 인사를 차렸다는 것이었다.

내가 朴장군을 좀 달리 보게 된 건 60년 6월 군기확립 문제를 다루기 위해 열린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였다.

4.19의 영향으로 군내에서도 정군 (整軍) 운동이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최영희 육참총장 주재로 회의가 진행됐는데 도중에 朴장군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의 부패상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그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4.19정신에 입각해 고급 장성들이 깨끗이 물러나는 것" 이라는 말로 발언을 끝냈다.

그러자 2군단장 김형일 (金炯一) 장군이 "군은 지휘계통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대장은 연대장보고 물러가라 하고, 연대장은 사단장보고 물러가라는 식으로 상급자 책임만 묻게 되면 군엔 이등병밖에 남지 않을 것 아니오" 하고 반박하던 기억이 난다.

며칠 후 육본에서 朴장군을 우연히 만났다.

내가 "朴장군, 나도 물러가야 하오?" 라고 농반 진반으로 묻자 그는 씩 웃으면서 "姜장군님은 아닙니다" 하는 것이었다.

내 아내도 박정희 장군에 얽힌 조금은 흥미로운 기억을 갖고 있다.

아내 말에 따르면 5.16거사가 있기 얼마 전 육군본부에서 만찬파티가 열렸다.

파티에는 한국군과 미군 장교 50명 정도가 참석했는데 다들 부부동반이었다.

朴장군만 혼자였다.

공교롭게도 아내와 朴장군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대각선상으로 2m 정도 떨어져 앉게 됐다.

그런데 아내 기억으로는 이날 朴장군의 표정이 그렇게 심각할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골똘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내는 속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다들 부부동반으로 나오는데 부인을 데리고 올 것이지, 또 이왕 파티에 왔으면 억지로라도 웃는 낯으로 분위기를 맞추든가 할 일이지, 저렇게 얼굴을 찌푸린 채 자리를 망칠 게 뭐람' . 아마 이 때는 朴장군이 5.16거사 계획을 한창 진행시키고 있던 시점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사전에 예정된 파티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면 방첩대 같은 군 정보기관으로부터 의심을 살 수도 있겠기에 굳이 참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남겨놓지 않은 일대 거사를 두고 파티장에 앉은 그의 심사가 얼마나 복잡했겠는가.

이상한 것은 부부동반이라면 나도 참석했을텐데 나는 도무지 이 파티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글= 강영훈 전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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