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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문을 닫고 싶은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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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얼마 전 서울의 한 사립대 이사장과 식사를 함께 했다. 교장.총장.이사장 등 700여명의 사학 관계자들이 여권의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성토하는 모임을 가진 지 이틀 뒤였다.

그는 그때까지도 격앙돼 있었다. "교육이념과 사명감을 갖고 일해야 할 설립자.이사장이 교수.교사에게 쫓겨나는 꼴이다. 결국 '주인없는 학교'가 되고 만다. 학교에 구심점이 없어지고 나가야 할 방향도 잃게 된다. 그래선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지난해에만 학교법인이 수익사업으로 벌어들인 240억원을 대학 발전에 쏟아부었다고 자랑했던 그다. 올해는 그보다 많은 돈을 투자하고 매년 늘려나갈 예정이라고도 했다. 2011년까지 국내 10위권 대학 진입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날은 고개를 내저었다. 사립학교법이 그대로 통과되면 이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라고 했다. 투자할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데 누가 열의를 갖고 학교 운영을 할 수 있겠느냐는 얘기였다.

대학뿐 아니다. 중.고교 사학도 사립학교법 개정을 둘러싸고 뒤숭숭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방에서 40년 넘게 중.고교를 운영하고 있는 한 이사장은 최근 기자에게 "차라리 도교육청에 학교를 팔아버리고 그만 문닫고 싶은 심정"이라고 푸념했다. 평소 다시 태어나도 "교육자가 되고 싶다"고 했던 그였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여권이 추진 중인 사립학교법 개정의 핵심은 사학 지배.경영 구조의 변경이다. 학교법인.이사회의 권한을 제한하고 교수.교사.학부모의 학교운영 참여를 확대해 사학의 비리를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얼핏 보면 민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일부 비리 법인을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사립학교 전체의 운영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사학단체들이 반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선 설립자의 건학이념을 실천하기 어려워져 학교운영 의욕을 꺾을 게 뻔하다. 교육보다는 학교운영에 더 관심을 갖는 일부 교원 중심으로 집단 간 알력과 갈등을 초래해 학교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개정안의 수혜자(?)라 할 수 있는 교장.교사조차도 걱정스러운 눈치다. "문제있는 교장.교사가 학교를 좌지우지해 교육이 망가지면 누가 책임질 거냐. "(한 교장), "전교조 교사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완장 싸움으로 학교는 ×판이 되고 말거다."(한 교사)

한결같이 '주인없는 학교'에 대한 우려다. 이런 상황이라면 사립학교법 개정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교원 임면권만 해도 그렇다. 학교장에게 그 권한을 넘기는 문제를 놓고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그러나 공개채용 등 교원 임면과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높일 수 있는 절차가 마련된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궁극적으로는 사학 비중이 큰 우리 교육현실을 감안해 어떻게 하면 사립학교를 사립답게 운영토록 해줄 것인가에 대한 정책이 담겨야 한다. 사학마다 현실적 여건이 다양한 만큼 일정 요건을 갖춘 사학에 대해서는 완전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게 한 방법이다. 사학의 자율성이 전제되지 않은 채 사학의 공공성과 투명성만 요구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여권은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9월 정기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그러나 당.정 간에 단일안 합의조차 못한 상태다. 사학을 혁신하는 일은 서둘러 밀어붙여도 될 만큼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자칫 법 개정의 틈바구니에서 학교현장이 혼란에 빠진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의 몫이기 때문이다.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남중 정책기획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