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를 뒤흔든 방송기술자의 용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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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지난 5일 오후 세르비아의 남부도시 레스코바치의 시민들은 느긋하게 유고와 독일간 농구중계를 보고 있었다.

경기는 유러피안배 농구 준준결승전인 데다 양국간의 해묵은 감정 때문에 시청률도 높았다.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전반전이 끝난 뒤 잠시 한숨 돌리던 시청자들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정규방송이 중단되고 화면은 먹통이 됐다.

또다시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의 공습이 시작됐나 우려하는 시민들의 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국이 수많은 청년들을 징집, 코소보로 끌고가 개죽음을 당하게 했다.

밀로셰비치가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당국이 코소보 주둔 세르비아군의 피해상황을 축소 발표했다" .

다소 떨리긴 했지만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레스코바치 지역 방송국의 방송엔지니어 이반 노브코비치 (34) .그가 TV 송출기를 조작, 10분 남짓 정규방송을 끊고 반정부연설을 한 것이다.

갑작스레 반정부 메시지를 접한 시민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방송사에는 경위를 묻는 전화가 빗발쳤고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의견교환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시위대는 순식간에 3만여명으로 불어났다.

노브코비치의 반정부 연설은 그동안 억눌려 있던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했다.

시민들은 "밀로셰비치 물러나라" 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밀로셰비치가 이끄는 유고 사회주의자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다.

시위대에 앞장 선 사람들은 나토 공습 도중 코소보에 파견됐다 귀환한 예비군들. 부상을 당해 휠체어나 목발에 의지한 상이군인도 상당수 있었다.

"레스코바치는 더 이상 밀로셰비치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다" 는 구호도 터져 나왔다.

다음날인 6일 노브코비치는 방송국에 들이닥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반항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평가는 역사가 해줄 것" 이라며 담담히 체포에 응했다.

당국은 그에게 시위선동죄를 적용, 1개월 징역형을 내렸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추가적인 징계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노브코비치의 체포소식이 알려지자 시위는 더욱 확산, 완전히 진압불능 상태로 접어들었다.

시위대는 인근지역 방송국으로 몰려가 시위소식을 방송하도록 촉구했다.

당국에 의해 완전히 통제된 지역방송국들은 레스코바치에 시위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일절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시위대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 방송국에 난입할 것임을 경고했으나 방송국들은 오히려 노브코비치가 언론의 자유를 남용했다며 정부 편을 들었다.

이에 시위대는 더욱 분노했고, 레스코바치의 반정부 시위는 인근 우지체.베오그라드 남서부 등으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니스.노비사드 등지에서는 밀로셰비치의 사임을 요구하는 대국민 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정현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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