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집시의 수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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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에 흩어져 떠돌아다니는 집시족에게는 춤과 노래가 생활의 일부라는 특징이 있다.

그들의 생활이 예술의, 특히 음악의 소재로 수없이 이용돼 온 것도 그 까닭이다.

대표적인 것이 사라사테가 작곡한 바이올린 독주곡 '치고이네르바이젠' 이다.

'치고이네르' 는 집시, '바이젠' 은 선율 혹은 가락이라는 뜻이다.

리스트나 브람스의 작품 가운데도 집시를 소재로 한 것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집시 여인' 이라는 대중가요가 등장해 크게 인기를 모았다.

한데 '집시 음악' 을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인생의 절망 등 깊은 비탄의 심정을 토로하는 곡과, 인생의 즐거움을 구가하는 경쾌한 곡이 공존한다는 점이다.

앞의 음악들을 '칸테 혼도' , 뒤의 음악들을 '칸테 플라멩코' 라고 한다.

집시 음악의 그런 양극적 요소가 집시족의 삶과 운명을 한마디로 대변한다.

자유분방하게 유랑하는 삶은 즐거울 수도 있겠지만, 유랑생활은 또한 그들이 가는 곳마다 따돌림이나 핍박의 원인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1933년 1월 히틀러정권이 출범하면서 나치독일이 '가장 비독일적인 종족' 이라는 이유로 집시족을 유대인과 함께 말살하려는 정책을 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정처없이 전세계를 떠돌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만큼 큰 화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또한 그 때문에 한 민족으로서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연대의식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 집시족의 장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최근의 코소보사태로 수난을 겪고 있는 집시족이 바로 오늘날 집시족의 현주소라고 할 수 있다.

집시족이 세르비아인을 도와 '부역' 했다는 이유로 집시족에 대한 알바니아계 사람들의 가혹한 보복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보복을 피해 유고 수도 베오그라드로 피해 간 수천명의 집시족은 그곳에서도 세르비아인들로부터 냉대와 멸시를 당하고 있다니 과연 이들이 갈 곳은 어디인가.

요즘 우리 신문과 방송을 통해 상세하게 보도되고 있는 이 땅의 탈북자들도 집시와 다를 바 없다.

남쪽에는 그들 모두를 받아들일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으니 한반도는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시처럼 이곳 저곳을 떠돌 수밖에.

그래도 나라 없는 집시족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집시족은 노래와 춤으로 시름을 달래기나 한다지만 앞길이 막막한 우리 탈북자들은 무엇으로 시름을 달래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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