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만4000송이로 단청 무늬 본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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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복판에 커다란 꽃밭이 들어섰으니 이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해지겠죠.”

서울의 새로운 명소가 된 광화문 광장의 ‘대형 플라워카펫’을 디자인한 플라워디자이너 정훈희(43·여)씨의 말이다. 광화문 광장 북쪽에 폭 17.5m, 길이 162m 규모로 조성된 이 알록달록한 꽃밭은 사진을 찍으려는 인파로 붐비는 관광 명소가 됐다. 잘라낸 꽃으로 만든 장식이 아니라 뿌리 달린 꽃을 통째로 흙에 심은 화단이라 두고두고 감상할 수 있다.

플라워디자이너는 화단에 꽃과 식물을 배치해 응용미술 작품을 만드는 작가를 가리킨다. 플라워어레인저라고도 한다. 생화로 작품을 만드는 플로리스트와도 일맥상통하는 예술가다.

최근 현장에서 만난 정씨는 “광화문 꽃밭은 전통 단청문양을 본뜬 것”이라며 “단청의 알록달록함을 살리기 위해 노란 골드메리, 보라색의 아스타, 빨간 베고니아 등 13종의 다양한 꽃 22만4000송이를 심어 만들었다”라고 설명했다. 꽃의 숫자는 서울이 조선의 수도가 된 1394년 10월 28일부터 광화문광장 개장일인 2009년 8월 1일까지 22만4537일을 상징한다.

영국에서 플라워디자인을 공부한 정씨는 서울시의 요청으로 지난해 4월 서울시청 앞 화단, 올해 3월 남산공원 화단을 각각 디자인했다. 두 곳의 작품이 호평을 받으면서 이번 광화문 플라워카펫의 디자인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패션 회사에 근무하다 디자이너 공부를 하려고 1996년 일본에 건너갔다. 어학연수를 하던중 어학원장으로부터 “앞으로는 플라워디자인이 유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일본의 화훼전문학교에 다니다 2002년 플라워디자인의 본고장인 영국 런던으로 건너갔다. 그때 나이 36세.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런던 서부 해머스미스 지역에서 영국식 민박집인 B&B(Bed&Breakfast)를 운영하면서 지역사회대학인 해머스미스 칼리지에서 꽃을 배웠다.

“영어가 좀 짧았지만 면접에서 ‘아이 캔 두 잇(I can do it: 나는 할 수 있어요)’를 계속 외쳤더니 입학 허가를 주더군요. 제 열정을 높이 샀나 봅니다.”

영국에 간 지 5년여 만에 학교를 졸업하고 현지 이벤트 회사에 취직해 백화점과 명품 숍의 꽃 장식을 맡았다. 6년간의 영국 생활을 마치고 지난해 귀국한 뒤론 서울 성북구 동선동 성신여대 근처에서 플라워카페를 운영했다. 그러다 감각이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서울시의 화단 조성을 맡게 된 것이다.

정씨는 “꽃을 통해 행복이 뭔지 알게 됐다”며 “꽃이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회가 되면 양로원과 교도소에서 꽃 디자인을 가르쳐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언젠가는 꽃이 아름다운 아프리카에 조그만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며 봉사의 삶을 사는 게 꿈”이라고 꿈을 밝혔다.

글·사진=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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