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유럽인이 본 조선 국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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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6세기 말부터 중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중국에 소개했다.

우월한 기하학 지식을 활용한 천문관측과 지도제작, 그리고 원근법을 쓴 화법 (畵法) 이 특히 큰 환영을 받았다.

청 (淸) 나라 강희제 (康熙帝.1661~1722) 는 선교사를 통한 신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마침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 (1643~1715) 는 온 세계의 과학적 조사에 의욕을 가지고 뛰어난 과학지식을 가진 선교사들을 열심히 중국에 보내고 있었다.그래서 많은 프랑스인 선교사들이 강희제의 조정에서 봉사하고 있었으니

두 임금의 궁합이 꼭 맞았던 셈이다.

강희제는 1708년 선교사들에게 국토측량을 맡겼다.

장 바티스트 레지, 피에르 자르투 등 선교사들은 천체관측을 통한 경.위도 측정과 인접지점 사이의 삼각측량으로 이 과업을 수행, 완성된 지도를 1718년 제출했다.

이 지도는 '황여전람도 (皇輿全覽圖)' 란 제목으로 간행됐다.

선교사들은 작업성과를 비밀리에 본국으로 보냈다.

이 자료를 곧바로 활용한 사람이 둘 있었다.

뒤알드는 중국에 관한 유럽 최초의 백과사전 '중국전지 (中國全誌)' (1735)에 조각조각의 지도들을 삽입했고, 당빌은 이 지도들을 체계적으로 편집해 '신중국지도첩' (1737) 을 냈다.

중국이 유럽열강의 무력 앞에 강제로 개방되는 19세기 말까지 모든 세계지도의 중국 부분은 당빌의 지도를 베낀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지도의 대부분에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유역이 조선의 영토로 표시돼 있다는 사실을 최근 뜻있는 연구자들이 밝혀냈다.

백두산정계비 설치 (1712) 직전 만주지역을 측량한 선교사들은 두 강 북쪽 유역을 조선 영토로 인식했기에 본국에 보낸 자료에 그렇게 표시했으리라 추측된다.

당시 청나라는 황실의 발상지 만주를 보호하는 봉금 (封禁)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인구가 희박한 상태였고, 실제로는 조선인이 많이 강을 건너가 살고 있던 상황을 선교사들이 파악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압록강과 두만강의 북쪽 유역에는 조선족의 비율이 높아 중국 영토지만 조선족 자치구로 운용되고 있다.

공식적 국경선은 두 강이지만 실제 한민족의 활동영역은 두 강의 북쪽 유역까지 포괄하는 셈이다.

이런 사실을 가지고 중국과 영토문제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수백년간 한민족이 자리잡아 온 역사적 연원을 생각한다면 국가를 초월한 '민족공동체' 의 일원으로서 그 지역 주민들이 유대감을 느끼도록 배려할 여지는 많다.

이런 배려가 진정한 민족통일의 일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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