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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방송이 성공한 정책이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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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정책사례 분석 토론회 보고에서 EBS 수능방송이 선진국의 교육모델을 답습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산업적 특성에 맞춘 성공적인 정책으로 평가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7차 교육과정의 1세대로, EBS 수능방송의 1세대로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 고3으로서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토론회 참석자들이 교육현장의 소리를 들어나봤는지 의심스러웠다.

사교육비 경감이라는 엄청난 기치를 들고 시작했던 EBS 수능방송은 수험생에게는 사교육비 경감 효과보다 학습분량 증대 효과가 훨씬 컸다. 시행 초기에 EBS 수능방송을 열심히 시청하던 친구들도 채 한달이 안 지나 "지겹다" "너무 많다"며 EBS 수능방송에서 하나둘 손을 떼기 시작해 지금은 우리 반에서 수능방송을 시청하고 있는 친구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반면 EBS 수능교재들은 불티나게 팔린다. 개중에는 학교 보충수업 교재로 채택된 것도 있다. 지난 한학기 동안 내가 산 EBS 교재만 스무권이 넘는다. 교재비 부담, 학습량 부담을 가중시키면서 나름대로 든든한 문제은행의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사설 입시기관의 강사들이 EBS 강사를 맡으면서 자신이 쓴 EBS 교재를 학원 수업에서 폄하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있기도 했다.

그러한 부작용이 있는 만큼 본래의 정책목표도 달성되었을까. 대답은 단호하게 '노'다. 시행 초기 이미 언론에서 보도된 바 있듯이 사교육비 경감 효과는 고작 한달이었다. 시행 한달도 안돼 유료 동영상 강의 사이트에는 EBS 강의내용을 정리해 주는 강의가 등장했고, EBS 수능방송에 지친 친구들은 다시 학원을 찾았다. 말하자면 EBS 수능방송은 과감하게 자유경쟁 시장에 뛰어들지 못했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강의'의 품위를 지켜야 했기에 강의는 모두 딱딱하게 진행되었고 자연히 강의에 대한 흥미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EBS는 사교육의 대용품이 되지 못했다.

EBS 강의 내용을 수능에 출제한다는 부분에 대해 EBS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겪고 있는 딜레마는 '얼마나 교육과정에 충실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교육과정에 충실하려 하면 수요자가 널려 있는 시중 문제집.입시학원 대신 EBS를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다. 시중 문제집 또한 교육과정에 기초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중 문제집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교육과정에서 벗어난 내용을 강의하고 그것을 수능에 출제하자면 그것은 수능을 시행하는 목적 자체를 훼손하는 일이다.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딜레마다. 우리나라의 사교육 과열은 수험생의 사교육 수요만 틀어막아 될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한글과 영어를 배운 채로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있고 초.중.고를 막론하고 적어도 한 학기 정도는 선행학습 하는 게 일반화돼 있다. 대입제도부터 시작해 학교급을 따라 내려가면서 하나씩 풀어 나가야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 엄청난 난제를 EBS 수능방송 하나로 막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교육에 대한 전체적인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대범 부산 사직고교 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