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39.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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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9장 갯벌

"참아야 한다는 이바구는 한국 떠나기 전에도 귀에 못이 박이도록 억수로 들었지만. 우리가 가지고 온 견본품이 단추 몇 개밖에 안된다카는 데 문제가 있는 거라요. 그거 주문받는 데도 부지하세월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면, 매일매일 발바닥에서 번갯불이 튀도록 바쁘게 살아온 우리네는 속에 천불이 나서 참고 견디기가 어려운 일이라요. "

"천불이란 말은 무슨 뜻인데요?" "안달이 나서 잠자코 견디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형, 좀 가만있어 봐. " 태호의 핀잔을 듣고 머쓱하는데 발걸음은 벌써 식당 문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옌지 시내의 궁위안제 (公園街) 모퉁이에 의류점포를 내고 있었는데, 모두가 한국에서 수입해간 상품을 팔고 있었다.

귀국한 뒤에도 여러 번 구매단에 끼여 한국을 드나든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서울의 남대문 시장이나 동대문시장에 관한 한 점포의 배치나 판매가격의 차이에 이르기까지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할 정도로 소상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녀가 꾸려 가고 있는 의류점포의 매상은 해를 거듭할수록 위축되어 고객들이 떠나고 있었다. 매상이 저조한 것은, 삼사년 전부터 땡처리된 한국 의류상품들이 무자비할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희소가치가 줄어든 데 원인이 있었다.

더욱이 지난 날과는 달리 중국의 한국상품의 상권이 웨이하이.칭다오.다롄.옌타이로 흩어지고, 그곳에 대형상가들이 속도 빠르게 들어서면서 옌볜 (延邊) 쪽의 상행위는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그나마 어렵사리 확보한 점포를 꾸려나가자면 품목을 바꿔야 할 단계에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홀지락홀지락 배갈을 마시곤 하였다. 그녀 역시 심기가 개운치 않다는 뜻이었다.

"인자 보이, 김승욱씨 배갈 한 도꾸리 정도는 혼자서도 싹 비울 실력이네요?" "서울 시절에 자취생활로 지냈기 때문에 무척 외로웠어요. 그때 배운 도둑질입니다. "

"한국말을 제대로 구사하는데요?" "여기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들은 대부분이 중국말도 제대로 못하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정쩡한 사람들이 많아요. 선생님들은 들어도 모르겠지만, 같은 조선족끼리는 당장 알아차리거든요, 어릴 적부터 중국말과 함경도 사투리를 섞어서 배우고 자라기 때문에 나중에 자라서도 두 가지 말 중에 한 가지도 똑똑하게 못하고 말지요. "

"봉환이형 같은 사람은 한국에서 태어나 이때까지 자라서 마흔살을 코 앞에 두고 있지만, 같은 한국 사람도 알아듣지 못할 얘기를 할 때가 많아요. 하물며 어린 날부터 두 가지말을 한꺼번에 터득해야 할 조선족들 입장에선 서툰 것이 당연하겠지요. "

"태호 니 봐라. 내가 사투리를 좀 쓴다캐도 여까지 와 가지고 날 챙피줄라카나? 니도 서울말씨를 쓰고는 있지만, 알고 보면 쑤악한 촌놈 장돌뱅이 아이가?"

"두 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까, 서울생활이 그리워지네요. 처음 갔을 땐, 서울 사람들은 다툴 일이 있으면 모두들 식당으로 찾아오는 줄 알았다니까요. " 그녀의 배려는 세 사람에게 숙소를 잡아두는 데까지 이어졌다.

여행경비를 펑펑 쓰고 다닐 처지들이 아니란 것을 알아채고 옌지빈관 근처에 있는 방 두 개짜리 빈 아파트를 수소문해서 숙소로 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아파트의 주방에는 간단한 식사는 손수 끓여 먹을 수 있는 주방기구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옌지에 떨어진 첫날 밤에 그들은 한결같이 거나하게 취해서 방으로 흩어져 활개를 쫙 뻗고 누웠다. 동서지간인 손씨와 봉환이가 동숙을 하였다. 이부자리도 펴지 않고 천장을 쳐다보며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는데, 누워 있던 손씨가 느닷없이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며 봉환에게 말했다.

"이봐, 동서. 연길에도 분명 노름판은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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