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비료주고 뺨맞는 '햇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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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 경비정이 서해 연평도 주변 북방한계선 (NLL) 을 침범, 해군의 고속정.구축함이 출동해 대치하던 10일 밤, 그 옆을 화물선 한척이 지나갔다.

이 배에는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우리가 북한에 보내는 6천t의 복합비료가 실려 있었다.

선장을 포함해 18명이 탄 이 화물선은 오후 11시 해주항에 도착, 비료 하역을 준비했다.

또 같은 시간, 동해에서는 6백41명의 금강산 관광객을 실은 현대 풍악호가 NLL을 넘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이 한날 한시에 이뤄진 것이다.

북한이 우리 영해를 침범했는데도 '월선 (越線)' 했다고 '두둔' 까지 하던 정부는 11일에야 '밀어내기식' 해결을 시도했다.

그간의 미온적 대처와 전략 부재를 지켜 보노라면 진땀이 난다.

10일 오후에야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상임위는 북한 함정에 대한 대응책과 남북 차관급회담 (21일.베이징) 대표단 선발을 함께 논의한 희한한 회의였다.

3시간 논의 뒤에 나온 '결정사항' 어디에도 '영해 침범' 이나 '도발' 이란 표현은 없었다.

46년간 북한측도 존재를 인정해오던 NLL과 완충지역을 우리 군 당국이 먼저 "경계선이 모호한 지역" 이라고 말해버려 북한이 이 문제를 물고늘어질 여지를 남겼다.

아무리 급하기로서니 "그 정도까지는 들어와도 좋다" 는 식의 얘기를 해버릴 수 있는가.

'군사도발이 계속되면 비료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 며 북한에 압박을 가하는 방책 등은 아예 기대할 수 없는 상태다.

지난 7일 이후 닷새 동안 계속된 북한군의 영해 침범은 이렇듯 '햇볕론' 에 발이 묶인 정부 대북정책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물론 모처럼 마련된 차관급회담에 거는 정부 기대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렇지만 정부의 대북전략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회담장에 가봤자 뻔하다는 비아냥까지 나온다.

북한계략에 끌려다니다 이산가족 문제의 논의는 고사하고 비료 20만t (6백억원 상당) 만 떼인 채 빈손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허언이기를 바랄 뿐이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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