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 상류층으로 솟은 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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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자네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 이후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발돋움했다며? 축하하네.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했나, 기회는 위기 속에 있다고 했잖나.

IMF한파로 모두 고통받는 줄 알았더니 자네처럼 기회를 잡은 사람도 있는 걸 보면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옛말은 틀림없어. 공식 통계로 보면 자네 같은 행운아는 아주 드물어.

'당신은 어느 계층에 속합니까' 라는 설문을 던지면 상류층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0.6%밖에 안돼. 나머지 99.4%는 하류층 또는 중류층이라고 대답하지. 그러나 이건 엄살 중에도 상엄살이야.

역시 숨은 부자가 많아. 그 증거를 대볼까. 최근 넘쳐 흐르는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고 사치성 소비재 수입이 급격히 느는가 하면 전체적인 소비성향이 IMF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건 잘 알지? 이게 다 자네들의 수효가 많고 또 자네들의 소비심리가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야.

거기다 최근의 옷 로비 사건은 상류층의 규모가 넓고도 깊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네. 이렇게 볼 때 한국 상류층의 특징은 첫째 지금까지는 숨어 살았고, 둘째 최근 들어 공직자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야.

거기다 자네의 부상 (浮上) 은 강력한 이론적 뒷받침을 받고 있어. 가령 과소비 시비라도 일어날 참이면 지금처럼 과투자 과설비를 해소해야 하는 과정에선 상류층의 소비라도 일어나야 성장이 회복된다는 반론이 즉각 제기된단 말야.

이런 변론을 케케묵은 굴뚝경제 옹호론이라고 무시할 필요는 없어. 환경 훼손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사회에서는 소비를 절약해야 한다는 말도 아직 우리에겐 사치 (奢侈) 야. 있는 사람은 좀 쓰라는 권장을 그저 따라가면 되는 세상이야.

자네들의 소비성향 덕분에 지난해 4분기의 마이너스 5.3% 성장이 올 1분기에는 플러스 4.6%로 반전되지 않았나. 6개월 사이에 무려 10% 가까운 고도성장이 이뤄졌으니 누가 한국을 IMF 위기를 겪은 나라라고 생각하겠나. 그러니 자네 같은 소비계층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가.

다시 한번 축하하네. 그래서 말인데 자네에게 두가지 부탁이 있네. 이런 부탁은 근사한 소비수준에 걸맞게 행동거지도 근사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야. 이런 얘기는 최근 수년간 골백번도 더 나왔어. 우선 자넨 '높은 신분엔 의무가 뒤따른다' 는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 라는 말을 잊으면 안돼.

쉽게 말하면 '양반이면 다 양반인가, 양반다워야 양반이지' 하는 소리야. 자네는 절제할 때 절제할 줄 알아야 돼. 한국의 자본주의는 천민 (賤民) 자본주의라는 비아냥을 행동으로 배격해야 돼. 그리고 자네는 말을 해야 할 때는 말을 할 줄 알아야 돼.

자네는 골빈 소비광이 아니야. 가령 높은 분이 자네 의견을 물어볼 때 자신의 의견부터 얘기하면서 은연 중에 자네 말을 막아 버리면 '제 의견을 들으실 작정입니까, 아닙니까' 해야 돼.

'지도자가 현명한 까닭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널리 듣기 때문이요, 지도자가 어리석은 까닭은 편협되게 어떤 한 부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 이렇게 자네 얘기할 수 있어? 들끓는 여론을 마녀사냥이라고 단정지을 때 '그게 아닙니다' 할 수 있어? 가만히 보니 그저 손을 비비며 '예 마녀사냥입니다' 하더군.

두번째로 자네는 도덕적 해이 (解弛) 라고 말하는 도덕적 위험 (moral hazard) 을 경계해야 돼.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모든 게 정당화되는 게 아니야. 누가 보지 않고 나무라지 않더라도 신의 (信義) 성실의 도리를 다 해야 돼. 법으로만 이끌고 형 (刑) 으로만 다스리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다는 가르침도 있잖나.

앞 뒤를 살필 줄 아는 자네가 뻔뻔해질 수는 없는 일이지. 한국의 위험은 다름아닌 상류층의 위험일세.

김성호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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