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지도가 바뀐다] '모래시계'를 거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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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4.19, 6.3, 민청학련으로 이어진 진보적 지식인 집단의 이름은 곧바로 386세대로 넘어가버렸다.

나를 포함하여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와 전두환의 5.18 사이에 대학을 다닌 세대는 그래서 이름이 없다.

어느 세대인들 애환이 없으랴만, 우리는 유신독재의 광기 앞에 숨 한번 크게 쉬어보지 못하고 청춘을 보냈다.

80년 봄 두달을 빼면 공개적인 학생단체도 대규모 가두시의도 조직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철.유인태.김병곤과 같은 '정치사형수' 도, 김민석.함운경.허인회 같은 오빠부대의 스타도 배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냥 소리없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민청학련세대가 정당과 결합하여 권력의 중심부로 각개약진하고, 386세대가 6월의 거리에서 빛나는 집단적 승리를 일구는 동안 학계. 언론. 문화. 기업.정부. 법조. 노동운동. 시민운동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스스로를 재교육하면서 자기의 영역을 개척해 왔다.

우리는 아무런 진보없이 같은 일을 반복만하는 '모래시계' 를 거부한다.

우리는 한때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 를 위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살다 가기로 결심한 적이 있으며,가슴 깊은 곳에 그 꿈을 간직한 채 세월을 견뎌왔다.

정권교체라는 오랜 숙원을 푼 뒤 전망을 잃은 채 휘청거리는 우리 사회는 우리들 '이름없는 세대' 에게 요구하는 듯 하다.

각자가 지금 선 그 자리에서 서로 손을 내밀어 잡고, 함께 그 꿈을 펼쳐보라고.

유시민 <시사평론가.78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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