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으로 옮기는 부품업체 사장 김재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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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기업인이 고국을 등지려고 하겠습니까. 웬만하면 국내에서 돈을 벌어 세금을 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젠 나가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지경까지 왔습니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더 이상 국내에서 버틸 힘이 없습니다."

▶ 피닉스전자부품의 김재기 사장은 "불황으로 납품대금을 떼이는 일이 잦아져 경영이 어렵지만 사회에 퍼지고 있는 반기업 정서가 기업인을 더 힘들게 한다"며 수북이 쌓인 부도수표를 보여주고 있다. 임현동 기자

경기도 안양의 만안공단에 있는 중소업체인 피닉스전자부품의 김재기(53) 사장은 사장실에서 한숨을 내쉬며 이같이 말했다.

김 사장은 지난주 중국 당국이 내준 '사업자등록증'을 손에 쥐었다. 그는 "귀국 비행기 안에서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사업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심경이 착잡했다"고 토로했다.

그가 중국으로 공장 이전을 꾀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 5년간 중국 측과 투자 협정을 다섯번이나 맺었지만 투자 단계에서 마음을 바꿨다.

그는 거래업체의 부도 어음과 수표를 한 뭉치 보여줬다. 최근 경기가 나빠져 납품 대금을 떼이는 일이 빈번해졌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요즘은 회사가 낸 이익으로 거래업체의 부도 어음과 수표를 메우기도 땀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전자제품 케이스를 만드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10년간 생산직 일을 하면서 터득한 기술을 바탕으로 독립했다. 피닉스전자부품은 지난해 20억원의 매출을 올린 전형적인 중소기업이다. 그러나 근로 여건이 좋지 않아 국내 근로자들이 기피하는 업체다. 이 회사는 2교대로 철야 작업을 한다. 생산라인을 멈추면 제품을 찍어내는 플라스틱 사출기 안의 원료가 변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회사는 8명의 외국인 일손에 기대고 있는데 이들에게 월급주기도 힘에 부친다며 김 사장은 외국인 산업연수생의 월급 명세서를 내보였다. 한달 평균 130만원이었다. 더구나 지난 17일 고용허가제가 시행돼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뽑기도 쉽지 않아졌고, 고용허가제를 통해 외국인을 뽑으면 인건비 부담은 지금보다 30%나 더 늘어난다고 김 사장은 설명했다.

그는 "중국 현지 근로자의 희망 봉급은 우리 돈으로 10만원이 채 안 돼 국내에서 외국인 근로자 한명의 월급이면 10명 이상을 고용할 수 있어 당장 살아남기 위해 중국으로 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사장은 또 1t에 85만원 하던 원자재(석유화학제품) 값도 1년 새 180만원으로 껑충 뛰어 생산원가가 크게 올랐지만 납품가격에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치솟는 원자재 값은 손을 써 볼 방법이 없어 한 푼의 인건비라도 아끼려고 가족을 회사로 불러들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자가 찾아간 날에도 김 사장의 부인은 공장 한 쪽에서 원료 부대를 나르고 있었다. 자식들도 틈틈이 회사에서 사무를 정리하고 심부름을 한다고 말했다. 경리업무는 아르바이트생을 써서 해결한다.

온 가족이 나서 회사를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김 사장이 중국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최근 확산되고 있는 '반(反)기업정서'도 한몫했다. 그는 "기업인은 근로자를 착취하는 '노예 상인'쯤으로 여기는 풍조가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얼마 전 한 외국인 연수생이 공장을 빠져 나가 시위에 참여하는 바람에 어이없는 곤욕을 치렀다. 외국인에게 월급을 제대로 주고 숙식을 도와줬는데도 일부 인터넷에 회사 이름이 올라 낯이 뜨거웠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당국도 기업인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고 시위 현장의 외국인 말만 믿느냐"며 "일부 언론도 기업인을 깎아내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 회사는 중국 산둥(山東)성에 1700평짜리 공장을 임대했다. 국내에 있는 비좁은 공장(부지 160평)보다 10배쯤 넓다. 올해 말까지 국내 생산라인의 절반이 그곳으로 이전된다. 중국 당국은 이 회사가 갖고 있는 휴대전화 외장재 등의 금형과 인쇄 기술을 인정해 공장 이전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김 사장은 말했다.

안양=고윤희 기자<yunhee@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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