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32>‘겨울 공화국’ 필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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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호 10면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고 잇따라 긴급조치가 발동하면서 문인들은 작품 활동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 한마디 잘못해도 호된 곤욕을 치르는 판국에 기록으로 남는 글 속에서 ‘…위반’의 혐의를 뒤집어쓰게 되면 그 불똥이 어디로 어떻게 튈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현실 참여’의 문학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소재나 표현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문학 작품을 다루는 신문·잡지의 편집자들도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대목이 보이면 게재를 않거나 필자에게 수정을 요구하기 일쑤였다. 편집자들은 그것을 ‘물밑 검열’ 혹은 ‘자율 검열’이라고 표현했다. 그런 분위기 탓이었는지 유신 선포 이후 2~3년간 문학 작품으로 인한 이렇다 할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자각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것은 74년 11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가 발족하면서부터였다.

‘자실’ 발족에 앞서 발표된 ‘문학인 101인 선언’에는 지방에서 활동하는 문인들도 많이 참여했다. 광주에서 여고 교사로 재직 중이던 젊은 시인 양성우는 ‘자실’을 주도하는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70년 조태일이 주재하던 ‘시인’지를 통해 등단한 그는 초기에는 주로 섬세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서정적인 작품들을 발표해 왔으나 ‘자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후부터는 현실적인 여러 가지 문제에 깊이 천착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유신 치하의 살벌한 분위기를 동토(凍土)에 비유한 시 ‘겨울 공화국’은 양성우가 김지하의 뒤를 이어 70년대 참여시·저항시의 흐름을 주도하리라는 예고였다.

‘자실’ 창립에 참여하고 광주로 돌아온 양성우는 곧바로 ‘겨울 공화국’을 썼으나 이 시는 당연히 발표되지 못한 채 서랍 속에 처박혀 있었다. 이 시가 활자화되기 전에 처음으로 시인 자신에 의해 낭송된 것은 75년 2월 12일 광주 YWCA회관에서였다. 이날 그곳에서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 구속자 석방 환영회 겸 구국 금식기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시는 낭송되자마자 수많은 참석자에게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짙은 공감대를 형성했고, 입에서 입으로 전파돼 곧바로 광주 일대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다행스럽게도 긴급조치 4호, 5호가 해제된 후여서 구속은 면할 수 있었으나 후유증은 엉뚱한 곳에서 싹트고 있었다. 양성우가 재직하던 중앙여고로부터 사직 압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중앙여고는 그 무렵 광주에서 금호그룹을 창업하고 사세를 계속 키워 나가던 박인천이 이사장이었다. 박인천이 정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때였으므로 양성우를 파면하라는 정보기관의 압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양성우가 사퇴하지 않고 계속 버티자 학교 측은 3월 12일 박인천을 위원장으로 하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양성우를 파면하기에 이르렀다. ‘자실’이 진상조사단을 광주에 파견해 관계당국에 파면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져 항의했으나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양성우가 학교 측에 제출한 재심 청구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양성우는 여느 때처럼 출근했으나 교무실의 그의 책상은 치워졌고, 서무실에는 기관원들이 진을 치고 있어 살벌한 분위기였다.

이때부터 양성우의 파면에 항의하는 여학생들의 시위는 연일 계속됐고, 매일 출근한 양성우는 경비실에 앉아 창밖으로 제자들의 시위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4월에 접어들자 정보기관은 양성우에게 광주를 떠나라고 윽박질렀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양성우는 광주를 떠나 구례의 천운사에 은신했지만 기관원의 감시는 계속됐다.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천운사를 몰래 빠져나와 다시 광주로 돌아온 양성우는 하릴없이 무등산 언저리를 맴돌다가 그를 찾아 내려온 ‘자실’의 대표간사 고은을 만나 함께 서울로 올라온다.

이것이 ‘겨울 공화국’ 필화의 전말이지만, 2년 후인 77년 6월 발생하는 ‘노예수첩’ ‘우리는 열 번이고 책을 던졌다’ 등 두 편의 시로 인해 빚어진 필화사건에 비교하면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양성우는 이 사건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됐는데, 이 사건과는 별도로 고은과 조태일은 시집 ‘겨울 공화국’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가 한 달 후 기소유예로 석방되는 등 ‘겨울 공화국’으로 빚어진 파문은 70년대 중·후반 내내 이어졌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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