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81세 노인 블로치옹, 요세미티 엘캐피탄봉 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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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하얀 눈에 반사되는 햇빛이 눈부셨다.

바늘로 찌르는 듯하던 무릎 통증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23일 오후 5시, 게리 블로치 (81) 는 드디어 해발 2천3백7m의 엘캐피탄봉 정상에 발을 디뎠다.

자신이 13년 전 세운 엘캐피탄 최고령 등정 기록을 깨는 순간이었다.

발 아래로 요세미티 계곡의 거친 물줄기가 보였다.

노 (老) 등반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 난 해냈어. " 블로치가 지난해 9월 미 캘리포니아주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캐피탄 등정계획을 밝혔을 때 그의 친구들은 "농담 말라" 며 웃었다.

이제 휴식을 취하며 공원산책이나 할 나이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더욱이 빙하에 깎여 만들어진 엘캐피탄의 아슬아슬한 절벽은 전세계 암벽등반가들을 유혹할 만큼 위험했다.

그러나 블로치는 속으로 '너희들의 콧대를 꺾어주겠다" 며 결의를 다졌다.

8개월간 턱걸이 등으로 체력을 다지는 등 만반의 준비 끝에 블로치는 12일 오후 4시, 오렌지색 헬멧과 무릎보호대로 무장하고 요세미티 계곡 베이스캠프를 떠났다.

엘캐피탄만 50여회 등반한 가이드 마이크 코빗 (45) 과 역시 베테랑 등반가인 NBC 카메라기자 크레이그 화이트 (48)가 그와 동행했다.

하지만 이번엔 지난 86년 때보다 더 험한 루트였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악천후가 겹쳤다.

음식과 물의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중간에 블로치의 관절염 약까지 떨어져 베이스캠프로부터 공급받았다.

1주일 내에 정상에 오르리라던 목표는 접어야 했다.

그러나 마지막 한 걸음까지 블로치는 동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

뉴저지주 (州) 의 화학공학자였던 블로치가 처음 암벽등반을 시작한 것은 16세 때. 사실 그가 바란 것은 암벽을 타다 어딘가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었다.

2세 때 어머니를 잃은 블로치는 어렸을 때부터 외롭게 자랐다.

백내장 수술을 받기 전까진 두툼한 렌즈의 안경을 꼈고 집에 틀어박혀 소설을 읽으며 지냈다.

대학 졸업조차 바라지 않던 그였다.

불행은 친구에게 일어났다.

블로치의 21번째 생일을 며칠 앞둔 39년 4월 3일, 함께 암벽 등반에 오른 친구가 밧줄을 뒤에 묶고 내려오던 중 실수로 암벽에서 퉁겨져 나갔다.

암벽 모서리에 걸린 밧줄에 매달려 숨진 친구를 발견한 그는 다시는 암벽등반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3개월 후 그는 바로 그 암벽에 다시 올랐고, 혼자 무사히 내려왔다.

친구의 비극으로부터 생긴 모든 고민을 털어내는 길은 암벽등반을 계속하는 것 뿐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60여년간 미국 전역의 암벽을 누볐다.

블로치는 지난해 11월 55년간 동고동락해온 아내를 폐병으로 잃었다.

암벽등반을 '미친 짓' 이라고 말리면서도 그가 가는 곳이면 항상 따라와 베이스캠프에서 무사귀환을 빌어주던 아내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죽는다는 것이 두렵지 않다.

아내 대신 베이스캠프에서 초조히 기다리던 그의 오랜 친구 켄 생마스터 (78) 와 헤이즐 (74) 부부는 그의 정상정복 소식을 듣자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나이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뭔가 하겠다고 결심하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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