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 패자부활전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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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번 대통령은 영원한 대통령이다.

잘했든 못했든 역사에 대통령으로 길이 기록될 전직 대통령들이 험담 (險談) 과 험구 (險口) 로 가득찬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이 분들이 한때 나라를 이끈 정치지도자였던가 하는 국민적 실망과 분노, 자괴감마저 자아내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났을까. 나는 여기엔 몇가지 복잡한 정치적 배경이 뒤섞여 있다고 본다.

그 첫째가 정치사적 인과관계다.

우리의 반세기 정치사 속엔 4.19와 6.29, 5.16과 12.12로 대분 (大分) 되는 두축의 큰 정치변동이 있었다.

하나의 흐름이 민주혁명 또는 민주항쟁이라면 또다른 축은 군사혁명 또는 쿠데타다.

두축의 각축과 마찰이 정치적 변동을 낳고 이에 따라 집권세력의 정치적 스펙트럼도 양분됐다.

민주세력이 DJ와 YS라면 군부세력이 '박통 (朴統)' '전통 (全統)' '노통 (盧統)' 이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양극관계다.

그러나 인간사란 이처럼 똑떨어진 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민주세력인 YS는 3당합당을 통해 군부세력.근대화세력의 힘을 빌려 집권했다.

집권 후에는 역사 바로세우기로 군부세력 두 전직을 일거에 감옥으로 보냈다.

DJ 또한 5.16세력의 힘을 업고 DJP 연합정권을 창출했다.

분명 다른 정치적 스펙트럼끼리 헤쳐 모여를 거듭했으니 옥석 (玉石) 이 구별되지 않고 정통성이 서로 어긋난다.

이러니 서로가 아전인수격 정통성을 주장하는 자기미화 발언이 나온다.YS의 최근 반독재 선언이 대표적 경우다.

정치사적 복잡한 인과관계가 전직들간의 선명성 공방으로 치닫고 있다.

그 다음, 후계자 선정을 둘러싼 권위주의 시대의 정치 폐해가 오늘의 전직들간 싸움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통' 은 이렇게 말했다.

국정능력을 의심했지만 대안이 없어 YS를 후계자로 선택했다고. 전통이 노통을, 노통이 YS를 그것도 마지 못해 손들어주니 후임이 전임을 씹고 전임이 후임에 야속한 마음을 가지면서 서로가 맺힌 한을 품게 된다.

국민이 선택하고 결정할 대통령을, 퇴임후를 걱정해 후계자에게 보험을 드는 왕조시대형 후계자 선정방식을 취하니 지금 이런 식 파탄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전직들은 단지 지난 구원 (舊怨) 때문에 국민들이 손가락질하는 입씨름을 계속하는 것일까. 이 분들 또한 온갖 책략과 권모술수로 권좌에 오른 분들이다.

카터식 (式).부시식 폼나는 미국 전직들의 유유자적을 모를 리 없을 게다.

이처럼 설쳐서는 전직 대통령마저 실패할 것이 뻔한데 멈추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엔 내각제라는 현실정치와 깊은 함수관계가 있다고 본다.

전직이 현직이 될 수는 없지만 현직에 상응하는 정치활동과 정치 장악력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장치가 내각제다.

임기없이 무제한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게 내각제 아닌가.

침묵으로 일관하는 단 한분 전직을 빼고 세분 전직들이 이처럼 설치는 데는 내각제를 전제로 한 뭔가의 실익을 찾자는 분명한 계산이 섰기 때문이라고 추론한다.

국민들이 '백팔배 (百八拜)' 를 한들 정치를 안한다고 하면서도 무슨 법회를 찾아다니며 정치적 발언을 하고 측근들의 정치활동을 막을 수 없지 않느냐고 발뺌하는 저의가 무엇일까.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지역기반에 추종자 또한 적지 않다.

움직이지 않으면 좌초한다는 발상으로 꾸준히 발언하고 해명하며 신문에 얼굴이 나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동조자를 규합하고 지역맹주로 자리잡으려면 잠시의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집권측은 TK 출신의 전직을 '사도 바울' 로 치켜세우면서 두 전직이 한 전직을 왕따로 모는 현재 상황을 즐기는 듯하다.

현직 대통령이 나서서 과거와의 화해를 외치고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TK 정서의 핵심인 박정희 찬양에 인색하지 않았다.

전직들은 내각제를 전제로 지역맹주를 꿈꾸고 현정권은 총선을 겨냥한 동진 (東進) 정책과 전국정당화를 도모하는 동상이몽 퍼레이드가 저질논쟁의 실체가 아닐까. 내각제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거듭 내각제를 반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을 창출해야 할 새 세기의 출발점에서 청산해야 할 전직들의 패자부활전을 더이상 볼 수도, 봐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패자들의 부활전을 즐기고 부추길 일이 아니다.

반세기 굴절된 한국 정치사를 바로 펴고 새 시대 새 정치를 열기 위해서도 패자들이 춤추는 내각제 마당을 걷어치워야 한다.

이 마당이 열려 있는 한, 전직들의 꼴불견 추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권영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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