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글로벌케어 코소보 의료봉사 3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한낮의 더위가 조금씩 수그러드는 오후 7시 (이곳은 오후 8시는 돼야 해가 진다) .온종일 세 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던 헤디예 비티치 (40.여) 는 이탈리아 난민캠프내 조그만 광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광장 한켠에는 마차가 한대 서 있고, 그 옆 바닥에는 주먹만한 조약돌로 '루티에 페르 코소베 (LUTJE PER KOSOVE)' 라는 글씨가 씌어있다.

'코소보를 위한 기도' 라는 뜻이다.

남루한 천막으로 덮개를 씌운 마차 안에 들어있는 것은 코란과 성경. 비티치는 매일 이 시간에 모여드는 코소보 난민들 및 이탈리아 군인들과 함께 마차 안에 세워진 촛대에 불을 붙인다.

그리고 각자의 신인 알라와 여호와를 향해 기도를 올린다.

"내 아이, 레제프가 꼭 살아있기를 기원합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알라께서 함께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 유고사태가 비록 이슬람 교도인 코소보인들과 동방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들간 분쟁이 원인이 되긴 했지만 이곳 난민캠프 내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도간에 아무런 반목도 없다.

이들은 오직 하나의 목적, '코소보의 평화' 를 위해 두손을 모은다.

비티치는 아직도 지난달 4일 아침 나절의 일을 생각하면 온몸이 떨려온다.

이웃 도시의 '인종청소' 소식에 불안해 하며 식사를 하던 비티치와 네명의 아이들은 동네 어귀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총소리와 비명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르비아군이 나타났음을 직감한 장남 레제프 (17) 는 재빨리 짐을 꾸려 뒷산으로 피했다.

"그것이 레제프와의 마지막이었어요. 아직 살아있는지, 코소보해방군 (KLA) 이 돼 싸우다 전사했는지…. " 비티치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비티치 가족의 하루는 오전 7시에 시작된다.

이탈리아 캠프에서 지급해주는 빵과 우유.비스켓 등으로 식사한 뒤 남편 네질 (37) 은 쿠커스 시내로 나가 일거리를 알아보고 비티치는 가족들 속옷 빨래를 한 뒤 대야에 물을 길어와 아이들 목욕을 시킨다.

목욕탕은 텐트 밖 공터. 막내아들 데모크라트 (8) 는 대야 물을 첨벙거리며 장난치느라 바쁘다.

감기.설사 등으로 시달리는 다른 집 애들과 달리 건강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90년 9월 7일 코소보에서 독립공화국이 선포됐을 때 막내가 태어나 코소보의 자유와 민주를 기리는 마음으로 아이의 이름을 데모크라트 (민주주의자) 라고 지었지요. "

이웃 텐트 난민들과 고향에 남겨둔 가족 걱정, 장차 돌아갈 일들에 대해 얘기하며 시간을 보낸 비티치는 저녁 기도회를 마치고는 혹시나 장남 레제프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남편과 함께 25㎞쯤 떨어진 모리나 국경지역으로 향했다.

트럭을 두번씩 번갈아 얻어타고 도착한 국경 검문소. 그러나 국경이 봉쇄된 탓인지 인기척마저 뜸하다.

부엉이 울음과 간간이 이어지는 총소리가 이들 부부의 가슴을 갈라 놓는다.

이들은 문득 텐트에 남겨두고 온 세 아이들이 걱정스러워진다.

텐트촌 주변은 밤이 되면 가끔씩 총을 든 괴한들이 취재진.의료팀 등 외지인들의 돈을 노리고 돌아다니는 위험한 곳. 비티치 부부는 결국 다시 캠프를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달빛에 비친 긴 그림자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 코소보 난민돕기 성금계좌 = 국민은행 815 - 01 - 0029 - 814, 한빛은행 131 - 05 - 008845 (예금주 : 중앙일보)

◇ 후원 = 대한항공

쿠커스 = 최준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