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논문 중복 게재, 불법과 합법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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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논문과 관련한 교수사회의 도덕성이 사회적인 비판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해 교수사회는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 특히 사회적 지도층으로서 공직에 발탁되는 때마다 이런 시비가 계속되는 것은 국력의 낭비이며 이를 정돈하고 발전의 기틀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쟁점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방법 또는 결과를 도용하는, 말 그대로 표절행위와 자신의 업적을 여러 번 부풀리는 중복 게재다. 요즈음 대두된 자기표절이란 말은 중복 게재의 한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런 쟁점은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면 명쾌한 판단이 쉽지 않은 복잡미묘한 문제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표절이란 주제에 대해선 전문적인 견해, 상식적인 판단, 대중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그럴수록 합리적인 기준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논문은 저자 착상의 차별성이나 창의성, 검증가능성 및 앞으로의 분야 발전에 대한 기여도로 출판 여부가 결정된다. 이러한 논문을 작성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에 기여한 사람이 저자가 된다. 이공계에서는 아이디어나 기자재를 제공한 사람도 저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요소를 이들의 업적으로 인정하도록 윤리규정이 만들어진다. 남의 것을 도용하는 경우에는 매우 엄격한 처벌 기준이 적용되어, 교수 자격을 박탈당하는 경우도 있다.

논문의 중복 게재는 자신의 한 가지 업적을 여러 차례 출판을 통해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서울대학교도 이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인정되는 예외가 있다. 우리나라는 학문 공동체의 규모가 작아서 한글로 논문을 내면 외국에서 읽히지 않는다.

특히 국제적인 소통이 필요한 분야에서 우리의 연구수준이 올라갈수록 한글판 학술지가 약해지는 경우가 많다. 학자들이 가지는 욕망, 즉 자신의 주장을 넓게 펼치고 싶은 욕망에서 영어로 논문을 작성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학계의 활성화 문제를 생각한다면 한글판 학술지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한글로 논문을 쓰고, 영어로 같은 내용의 논문을 작성하더라도 이를 허용한다. 다만 영어로 논문을 작성하는 경우, 서울대학교는 한글판 논문의 존재를 참고문헌에 밝히도록 요구하고 있다. 즉, 영어판 논문에 한글 논문의 존재를 적시한다면 이중 게재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청문회를 앞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 정운찬 총리 후보자 논문의 이중 게재 문제도 이런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정 후보자가 한글 논문과 영어 논문을 각각 낸 것 자체는 이중 게재가 아니다. 다만 정 후보자가 한글 논문의 존재를 적시하지 않은 점은 아쉬운 일이다. 외국 학술지의 경우 다른 언어로 이미 발표된 논문을 영어로 실을 경우는 독창적인 논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관행은 그 국가 및 학계의 관행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자신의 주장을 인정받고 더 많은 사람이 알도록 하려는 학자적 욕구가 어느 순간부터 부정한 행위가 될 수 있는지를 정하는 기준이다. 자신의 주장, 즉 논문 내용을 다양한 형태로 널리 알리는 것은 권장할 만하지만, 논문 간 상호관계를 적시하지 않고 독립된 업적으로 포장할 경우 부정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문제는 따지고 보면 논문의 숫자만을 중시하는 기준이 만든 결과다. 언어가 다른 학술지에 게재한 것을 두 개의 논문으로 인정받으려 애쓰는 것도 ‘숫자주의’ 때문이다. 이를 한 개의 논문으로 이력서를 작성해도 질적인 평가가 중시된다면 표절 혹은 이중 게재 논란의 상당 부분은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민동필 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 전 학술진흥재단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