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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권자가 고마운 네 가지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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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제가 일본 유권자들께 고맙다고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철학을 가진 정치인을 총리로 뽑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정치란 이데아를 현실에서 구현하는 기술이며, 그 이데아는 다름 아닌 철학에서 나옵니다. 2400년 전 그가 ‘철인(哲人)정치’를 설파한 까닭입니다. 모름지기 정치인이라면 나름의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철학에서 원칙이 나오고, 원칙에서 정책이 나옵니다. 갈대처럼 흔들리며 인기에 영합하는 철학 없는 정치인들을 하도 많이 보아 온 탓에 비록 이웃나라 일이지만 철학을 가진 정치인이 총리가 된 ‘사건’을 제 일처럼 기뻐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여러분께서 선출한 하토야마 총리의 철학에 제가 깊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그가 시사월간지 ‘보이스(VOICE)’에 기고한 ‘나의 정치철학’이란 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의 사유에는 깊이가 있고, 성찰에서는 균형감각이 느껴졌습니다. ‘일본에 이런 속 깊은 생각을 하는 정치인이 있다니…. 이건 일본인들의 행운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데아인 ‘우애(友愛)’를 자립과 공생의 원리로 설명합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개성을 가진 유일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갖고, 또 그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고 하는 자립의 원리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립성과 이질성을 상호 존중하고 서로 공감하여 일치점을 추구해 협동해야 한다고 하는 공생의 원리를 중시하고 싶다”는 그의 인식에 저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가 인용한 ‘너는 너, 나는 나. 그러니까 더 사이 좋게 지내자’는 말, 이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제가 일본 유권자들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이유는 ‘운명적 사랑’을 해본 사람을 총리로 뽑았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하토야마 총리는 유학생 시절 총각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만난 유부녀, 그것도 네 살 연상의 여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저는 운명적인 사랑을 해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은 다르다고 믿는 편입니다. 운명 앞에서 겸허해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라고 할까요.

네 번째 이유는 제가 한국인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한다는 정치인을 총리로 뽑았으니 당연히 고마운 일입니다. 지난해가 일본 근대화의 길을 연 ‘메이지(明治) 유신’ 140주년이었습니다. 유신의 핵심 인사였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조선 공격을 통해 사족(士族)의 불만을 해소하고 사회에 누적된 악폐를 일신할 필요가 있다”며 정한론(征韓論)을 폈습니다. 같은 시기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내란을 부추기는 마음을 외부로 돌려 국가를 흥하게 할 원략으로 삼자”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40여 년 후 한일병합은 현실이 됐습니다. 그리고 내년이면 100년이 됩니다. 침탈의 대상이었던 한반도를 우애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정치인이 총리가 되기까지 140여 년의 세월이 걸린 셈입니다.

하토야마 총리는 열렬한 동아시아 통합론자입니다. 그가 꿈꾸는 동아시아공동체의 두 축은 어차피 일본과 중국이지만 두 축을 이어주는 연결축 역할을 한국이 할 때 동아시아공동체는 굴러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중·일 3국 간 협력은 동아시아공동체의 엔진입니다. 저는 한·중·일 3국 간 상설협의체를 한국에 설치하고, 이를 장차 동아시아공동체의 사무국으로 발전시켜 나아가자는 제안을 하토야마 총리께 하고 싶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한국을 배려하고, 동아시아 통합을 원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장소로는 인천쯤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하토야마 총리에 대한 기대만큼 우려도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아온 명문가 출신의 총리가 세상 물정을 얼마나 알겠느냐는 걱정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변화는 배고픈 현실주의자보다는 배부른 이상주의자에 의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진보주의를 이끌거나 후원한 세력의 중심에는 ‘리무진 리버럴(limousine liberal)’이나 ‘캐비아 레프트(caviar left)’로 불린 유한계층이 있었습니다.

하토야마 총리를 팍팍 밀어주십시오. 그것이 일본을 바꾸고, 동아시아를 바꾸는 길입니다. 일본 국민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