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北 '슈퍼돼지' 훔치기-영화 '간첩 리철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치기 어린 장난 같다. " 몇년전 극작.연출가인 장진 (28) 이 '서툰 사람들' 을 들고 나왔을 때 연극계가 보낸 시선은 이랬다. 그래도 그는 제길 만을 고집했다. 지난해 나온 '매직타임' 에서 장진은 자신에 대한 이런 편견을 다소 씻어 냈다.

그는 영화판으로도 눈을 돌렸다. 코미디가 무기였다. 데뷔작 '기막힌 사내들' .그는 밑바닥 인생들의 좌충우돌식 삶을 사회문제와 결부시켰다. 그러나 영화계 또한 "시도는 좋으나 너무 연극적이다" 고 냉소했다.

그래도 장르파괴적인 이 '문화게릴라' 는 갈길을 재촉했다. '수레바퀴에 맞서는 사마귀' 일망정 그는 꿋꿋이 자기주장을 펴 나갔다. 영화 '간첩 리철진' 은 그런 고민 속에 나온 그의 두번째 작품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간첩 리철진' 은 한국 코미디 영화를 진보시킨 성공작이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그동안 곡해를 받던 '장진식' 아마추어리즘이 반 (反) 충무로의 대안영화로까지 격상될 수 있다는 걸 증거로 내보인다. 세상을 은유하는 위트와 유머는 전작에 비해 훨씬 풍부해졌다. 이를 영화 속에 응축시키는 기법도 훨씬 세련됐다.

한국영화의 고질적 한계로 지적된 시나리오의 완성도는 올 상반기 개봉영화 중 단연 최고급이다.

이 작품의 주요 동기는 역시 코미디다. 이야기의 설정도 그렇다. 대남 공작원이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해줄 수퍼 돼지 유전자를 훔치러 왔다는 발상. 기발하면서도 무궁무진한 극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다.

영화는 네 집단의 활동상을 통해 긴장과 갈등을 증폭시켜 나간다. 리철진 (유오성) 과 고정간첩 오선생 (박인환) , 택시강도 일당, 북한공작원, 국가정보원 요원 등. 언뜻 복잡하게 굴러가는 듯한 네 개의 수레바퀴는 알력을 드러내지 않고 개연성의 틀거리안에 잘 엮인다.

영화는 복선의 능숙한 사용 덕에 마치 '퍼즐 맞추기' 같다. 화이 (박진희)가 그린 손바닥 데생이라든가, 전시회 퍼포먼스를 납치극의 현장으로 깜짝 변신시키는 데에서 복선의 활용은 빛난다.

유오성이 화이와 교감하는 연정의 절제미는 이 영화가 이룬 탈 (脫) 상투성의 백미다.

유오성은 무표정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간첩 역을 잘 소화해 냈다. 그가 '임무' 를 마치고 북으로 다시 돌아가는 도중 카페 '꿈의 궁전' 에서 수퍼 돼지의 북한 원조 소식을 듣고 자결하는 장면은 비장미가 넘친다.

거대 정치세력의 부속품에 불과한 개인의 삶이 파괴되는 우울함. 막판의 주제의식이 핏빛의 선홍색으로 발한다. 정규수 등 대학로 '장진사단' 조연들이 펼치는 사투리의 향연도 볼거리다.

이 작품은 스타를 배제해 10억원 안팎의 '저예산' 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악조건을 기획력으로 돌파, 작품성으로 승부수를 던진 셈이다. 앞으로 보다 인문학적 교양과 담대한 스케일을 갖춘다면 작가주의적 경향의 장진의 영화세계는 곧 대해로 헤엄쳐 나갈 것이다. 15일 개봉.

정재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