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새흐름 '멋대로' 잇따라 책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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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멋대로' 라는 단어에선 먼저 불량끼가 느껴진다.

여기에 '해라' 라는 명령어까지 붙인다면 뉘앙스는 선동적이기까지 하다.

최근 발간된 김현진 (18.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1년) 씨의 '네 멋대로 해라' (한겨레신문사.6천5백원)에선 얼핏 이런 불량끼와 선동의식이 먼저 묻어난다.

아마도 '원조 멋대로' 는 문화연구동인 미메시스의 '신세대 : 네 멋대로 해라' (93년.현실문화연구) 일 것이다.

이 책은 신세대의 독특한 감수성과 이미지를 문화연구 대상으로 삼은 국내 첫번째 시도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가뜩이나 이 동인 중 1명이 '전복을 향하여' 라는 서문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 사태를 빚을 정도였다.

원유순씨의 '멋대로 가족은 지금 행복중' (94년.지경사) , 만화가 나예리씨의 하이틴 순정만화 '네 멋대로 해라' (1~7권.94~96년.서울문화사)가 선보인 것은 그 연장선. 미메시스 동인 송재희 (37) 씨 등이 모여 다시 '샐러리맨 네 멋대로 해라' (95년.동양문고) 을 펴내며 신세대 직장인의 상상력을 재차 자극하며 나섰다.

이번 김현진씨의 단행본은 이런 시대적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아 진짜 '멋대로 한' 첫 세대의 고백록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우선 저자가 중학교 때 여성운동그룹 '또 하나의 문화' 를 통해 만났던 조한혜정 (연세대.사회학) 교수의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은 몸으로 쓴 처절한 학교현장 기술서다. 현진이의 표현을 빌자면 그 자신이 순진했기에 - 더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학교와 어른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리지 않았기에 - 남보다 어렵게 살아야 했고 그래서 이런 글을 써낼 수 있었다. "

사연은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에게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얻어터지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한다.

급기야 당시 개척교회 전도사 (현재는 목사) 였던 아버지가 찾아왔고 담임선생은 서슴없이 '이런 애는 기를 좀 죽여놔야 한다' 는 말을 던졌다.

이후 그녀의 학창시절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몇몇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 감화를 받았던 추억이 있기에 조금은 덜 억울할 정도였다.

아슬아슬하던 현진씨의 학창생활은 97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청소년문화제 출품용 단편영화 '셧 앤드 시' 를 만들어 상영한 직후 끝나고 말았다.

"친구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그냥 집에 가는 듯이 그렇게 나왔다.

사실은 그 애들과 웃던 공간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 과연 누가 그녀를 외로운 검정고시의 길로 내몰았을까. 끝내 저자는 허위의식으로 가득찬 학교사회를 향해 매몰찬 말을 던지고 만다.

"이미 갈 데까지 다 간 학교여. 차라리 정직하라. 그것이 그나마 그대들의 모습을 덜 구차스럽게 할지니" 라고 말이다.

이 책은 지난해 독서계를 강타했던 호주의 소설가 겸 만화가 앤드류 매튜스 (42) 의 '마음 가는 대로 해라' (노혜숙 옮김.생각의 나무) 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많다.

그가 "삶은 언제나 쉬워질까" 라는 의문을 달아놓고선 바로 이어지는 답변으로 "쉬워지지 않는다" 고 말하듯이 현진씨 역시 자퇴 (自退).검정고시.진로고민 등을 얘기하며 "정답은 없다. 마음대로 해라" 고 발언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제 어른들이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할 차례다.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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