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진의 시사각각

안중근 유해, 기적이 찾아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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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쐈으며, 이듬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형무소 당국은 근처 공동묘지에 시신을 묻었다. 안 의사는 해방되거든 조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국은 해방됐으나 유언은 아직도 이국(異國)의 산하를 떠돌고 있다. 지난해 3~4월 건국 후 처음으로 한국 정부는 발굴 작업을 벌였다. 유해를 찾지 못했지만 김 전 의원은 실망하지 않았다. 발굴단이 파헤친 감옥 뒤편은 그가 추적해 온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드리고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 하니, 그는 언젠가 하늘이 문을 열어 안 의사의 유해를 보여 줄 거라 믿고 있다.

김영광이 안중근을 만난 건 62년 전인 1947년이다. 수원농고 학생 김영광은 학교 연극 ‘의사 안중근’에서 안 의사 역을 맡았다. 모든 게 부족했던 시절이어서 망토 대신 담요를 걸치고 모의권총도 없어 나무딱총을 써야 했다. 연극은 가난했지만 안중근이란 이름은 16세 청년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나이가 쉰을 넘어서면서 국회의원 김영광은 본격적으로 유해를 찾아 나섰다. 먼저 그는 미국 서부로 날아가 안 의사의 손자 웅호(심장전문의)씨를 만났다. 오랜 설득 끝에 그는 유해를 찾아 봉환하는 일을 해도 좋다는 위임장을 받았다. 그러곤 묘소의 정확한 위치를 알 만한 이를 수소문했다. 해방 전 여러 번 묘소를 참배한 적이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기억하는 장소는 감옥 뒤편이 아니라 500m가량 떨어진 야산이다. 증언자는 “수십 기 가운데 안 의사 묘가 있었고 각목에 새겨진 이름에서 ‘근’ 자가 지워져 있었다”고 말했다. 그 증언자는 지금 죽고 없다.

증언이 나왔지만 김영광은 직접 뤼순에 갈 수 없었다. 80년대의 중공(中共·지금의 중국)은 한국과 국교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뤼순에 갈 수 있는 사람을 물색했다. 재미·재중 동포들에게 유해 찾기를 부탁했으나 별 진전이 없었다. 4년여의 노력으로 87년 그는 드디어 비자를 받았다. 뤼순 감옥 근처는 군사통제구역이었지만 김영광은 무작정 들어갔다. 중국 공안에 붙잡혔으며 벌금을 내고서야 풀려났다. 그는 다시 잠입했다. 안 의사의 감방과 사형장을 봤고 증언자의 약도를 들고 묘지가 있을 곳을 눈에 새겨 두었다. 감옥이 문을 닫은 지 60여 년이 지났다. 그러니 주인 없는 무덤들은 사라져 버렸을지 모른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20여 년 동안 뤼순에 가고 또 갔고 내일 다시 가는 것이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놓은 걸 버킷 리스트(bucket list)라고 한다. 그런 제목의 영화에서 잭 니컬슨과 모건 프리먼이 주연을 맡기도 했다. 김영광의 버킷 리스트는 안 의사 유해를 찾는 일이다. 해방 후 오랜 세월 수없이 많은 비바람이 묘지를 깎아 냈을 것이다. 그래도 기적이란 게 있지 않은가. 김영광의 발길이 닿는 곳에 안 의사 묘지가 있어 줬으면 좋겠다. 만약 안 의사가 이제는 땅속에서 나올 결심을 했다면 처음으로 만나는 한국인이 김영광이었으면 좋겠다. 그가 육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도 버킷 리스트 때문이 아닐까. 뤼순으로 떠나는 그를 보면서 나에게 물어본다. “먼 훗날 너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이 될 것인가.”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