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 쉬운 外信,어려운 外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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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 의 세르비아 공습이 강화되자 세르비아를 두둔하는 러시아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러시아 군대는 군함을 아드리아해로 보내기로 했고,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나토의 공격이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옐친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다분히 러시아 국내 여론을 다독거리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했지만, 러시아 사람들의 나토와 미국에 대한 반감은 그런 발언이 필요했을 만큼 거센 모양이다.

물론 러시아로선 냉전체제가 끝난 뒤 갑자기 추락한 자신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울분이 클 터이고, 이번 위기를 국제 무대에서의 발언권을 되찾는 기회로 이용하고 싶을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치부하고 넘기기엔 러시아의 반감이 너무 깊고 그들의 태도가 너무 당당하다.

그리고 그런 러시아의 항의를 나토는 물리치지 않고 되도록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그런 기사들을 읽으면서, 적잖은 독자들이 러시아와 나토의 태도에 의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르비아는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 사람들을 잔혹하게 내몰고 있고 나토의 공격은 그런 야만적 행동을 중지시키려는 노력인데다, 러시아의 이익이 침해받은 것도 아니니 러시아가 크게 반발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두나라가 인종과 종교가 같고 근년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그것들만으로는 러시아의 공격적 태도나 러시아 사람들의 나토에 대한 반감을 설명하기 어렵다.

실은 유고슬라비아는 제2차 세계대전 뒤 티토의 영도 아래 독자적 노선을 걸으면서 소련과 거리를 둔 공산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러시아의 반발을 보도한 기사들에는 그런 반발이 나온 까닭에 대한 설명이 따라야 했다.

그러나 그런 설명을 한 신문은 없었다.

두나라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설명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러시아는 15세기 이후 줄곧 자신을 기독교의 수호자로 여겨 왔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 군대에 함락돼 비잔틴제국이 멸망하자 러시아에선 '세번째 로마' 라는 교리가 나타났다.

첫 로마는 교황에게 지나치게 큰 권위를 부여한 이단 때문에 튜턴족에게 망했고 '두번째 로마' 였던 콘스탄티노플은 그런 교황에게 의탁하려 한 죄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에게 망했으니, '세번째 로마' 가 올바른 믿음인 정교의 중심지 모스크바에 세워진 셈이라는 주장이었다.

러시아는 그런 교리를 현실에 적용했으니, 1774년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맺어진 쿠축 카이나르지 조약에서 오스만 투르크는 러시아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안에 있는 정교와 슬라브족의 권리를 보호하는 수호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특히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관계는 긴밀했으니, 인종과 종교가 같을 뿐 아니라 러시아는 팽창정책을 펴서 터키와 끊임없이 싸웠고 세르비아는 독립을 얻으려고 터키와 싸웠으므로 둘은 자연스러운 동맹국이 됐다.

그래서 세르비아가 완전한 독립국가로 인정받은 것도 1878년 러시아와 터키 사이에 맺어진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였다.

그런 역사를 고려하면 러시아의 거센 반발과 나토의 유연한 반응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유고 사태는 처음부터 역사의 영향이 아주 강력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이 따르지 않으면 일반 독자들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며칠전에 나토가 해결책의 시안으로 내놓은 코소보 이분 (二分) 안만 해도 세르비아 제국 군대가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 크게 패한 1389년 '코소보 싸움' 의 역사적 중요성과 그 싸움이 벌어진 코소보 평원의 위치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져야 비로소 그 뜻이 제대로 잡힌다.

복거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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