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를 열며] 나라 사랑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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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선교사였던 그레슨 박사가 쓴 '그레슨 선교 수기' 에 의하면 1907년 정미 (丁未) 의병사건 때 성진 지방에서 일어났던 의병투쟁 사건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의 모든 무기창고를 접수했으며 한국 군대를 해산해 민간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일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고 재빨라서 무장해제당하기 전 약 1만명의 군인들이 총과 탄약을 몰래 빼돌렸다.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의병이라 불렀고 남한 각처 산으로 들어갔다.

일본군들은 마을 사람들을 집안에 가두고 문을 채우고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의병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완전 무장한 일본군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

그들뿐인가.

가녀린 처녀의 몸을 던져 일제 침략에 저항했던 유관순, 자신의 생명을 조국 독립에 바친 이준 열사, 그리고 이름도 빛도 없이 조국 독립과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지사들. 사이비 애국자와 지도자들을 대할 때마다 그분들이 그리워진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9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그 이듬해 3월 26일 뤼순 (旅順) 감옥에 수감됐다.

안중근은 체포되는 순간 "이등은 죽었는가" 라고 물었다.

누군가가 "그렇다" 고 대답하자 "천주님, 감사합니다" 라며 가슴에 십자 성호를 그었다.

"내가 죽거든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주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조국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오" 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안중근은 사형집행 전 "조선독립 만세" 를 목청껏 외친 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누구나 유관순.안중근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은 한 세기에 한번 나오기 어려운 애국자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민족지도자가 되려면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과 삶을 소유한 사람이어야 한다.

정치도 좋고, 기업도 좋고, 학문도 좋고, 사회운동도 좋다.

그러나 백성을 근심시키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은 지도자도 아니고 애국자는 더더욱 아니다.

천박한 부 (富) 보다 깨끗한 가난을 선택하는 사람, 사리사욕이나 당리당략보다 국가와 민족을 염려하는 사람, 그러면서 사 (私) 를 버리고 공 (公) 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

1975년 폴 포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메르루주 군은 4만여명을 킬링필드에서 무차별 학살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나뒹구는 해골과 뼈들을 볼 수 있다.

타락한 지도자 한 사람이 연출해낸 비극치곤 너무 끔찍하고 처절한 것이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백성은 순하고 바르다.

그래서 쉽게 따르고 세뇌당한다.

"민중은 빵과 서커스면 된다" 던 어느 철인 (哲人) 의 말처럼 민중이란 가장 기본적 욕구만 해결되면 말이 없다.

그러나 그 민중이 분노하고 입을 모아 소리지르기 시작하면 산천이 떨고 별들이 흔들린다.

순한 양이 사자로 변하는 가능성을 가진 것이 민중의 힘이다.

그래서 언제나 지도자들은 민중을 얕잡아 보아선 안된다는 교훈을 유념해야 한다.

그리고 순하고 말없는 백성이지만 어느 누가 애국자며 지도자인 것을, 그리고 누구 누구가 사이비인 것을 훤히 알고 있다.

단 얼마 동안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1919년 2월 8일 도쿄 (東京)에 있는 조선 YMCA 강당에 조선 유학생 4백여명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당시 유학생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유학생들도 함께 참석했다.

최팔용이 사회를 맡고 서춘과 이종근의 연설에 이어 백관수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김도연의 결의문 낭독으로 이어졌다.

식이 끝나면 시위에 돌입할 계획이었으나 일경 (日警) 들이 뛰어드는 바람에 시위는 취소되고 말았다.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요즈음 유학생들과 어떤 비교가 될지 자못 궁금하다.

학문에 정진해 세계적 석학 대열에 끼는 것도 애국이다.

각 분야에서 국위를 떨치는 것도 크나큰 애국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려면 분명한 국가관과 확실한 신념이 전제돼야 한다.

제 나라를 비웃고 홀대하는 사람, 남의 것을 높이고 내 것을 낮추는 사람들은 국민 자격도 없다.

지도자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미국 정부가 소수민족들에게 시민권을 주려할 때 반드시 묻는 질문이 있다.

"당신은 미국과 당신 나라가 전쟁을 하게 될 때 어느 편을 들어 싸우겠는가. " 우리 모두는 자문자답해야 한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리고 어느 편인가. "

"나는 한국 사람이오. 그리고 나는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 편이오. "

박종순 충신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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