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일본열도 구조조정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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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가동률은 90%에서 더 오르지 않고, 내수가 늘어날 전망도 없다. 이대로 계속 유지하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짐을 더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제조설비 한곳을 없애기로 했다. "

지난 9일 오이타 (大分) 공장의 에틸렌설비 (연산 24만t) 를 폐기하기로 전격 발표한 쇼와 (昭和) 전공. 가토 노부히로 (加藤信裕) 총무부 부부장은 "이로써 나머지 설비의 가동률을 1백%로 끌어올려 연간 30억엔의 경비를 줄일 수 있게 됐다" 고 설명했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매출액은 3천9백47억엔, 당기순이익은 27억엔. 설비폐기로 올해 매출액은 3천8백억엔으로 줄지만 순익은 40억엔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굳이 구조조정을 서두를 입장이 아니었는데도 다른 업체에 비해 신속한 '결단' 을 내려 업계의 화제가 되고 있다.

요즘 일본에선 구조조정의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과잉설비나 인원을 감축한다, 부채를 줄인다, 외자를 들여온다, 갖가지 구조조정 대책들이 연일 숨돌릴 틈 없이 터져나오고 있다.

누적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기업들은 말할 것도 없고 흑자를 내는 기업들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최근 첨단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2' 와 차세대 콤팩트디스크 (CD) 인 '슈퍼오디오CD (SACD)' 개발에 성공, 기세를 올리고 있는 소니는 지난해 18년만에 적자를 냈다며 인원 10% 감축 및 생산설비 통폐합 계획을 내놓았다.

전자.컴퓨터 업체인 NEC의 니시가키 고지 사장은 "3년내에 1만5천명 (국내 9천명, 해외 6천명) 을 줄이고 수익성이 낮은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겠다" 고 선언했다.

현재 2조4천억엔에 달하는 부채도 6천억엔 규모로 줄여 재무구조를 개선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서는 굵직한 해외사업을 상당수 포기해야 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주도해 기업을 채근해대는 한국과 달리 일본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 구조조정에 나서는 게 특징" 이라며 "그러다보니 속도가 빠르고 다양한 대안을 모색한다" 고 말한다.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며 일본 기업의 특징이라던 종신고용제도 무너지고 있다. 종합상사 레나운은 지난 5년간 종업원을 무려 65.9%나 줄여 '인원삭감' 부문에서 넘볼 수 없는 기록을 세웠다.

일본 최대의 통신업체인 NTT는 94년 이후 전체 직원의 4분의1인 5만명을 내보냈다. 닛산도 같은 기간중 1만명을 감축했다.

그래도 과잉고용은 해소되지 않아 기업들은 추가감원에 나설 움직임이다. 전자.가전업계에서는 요즘 '50만명 추가 감원설' 까지 나돌고 있다.

단순히 살아남기 차원을 뛰어넘어 국제경쟁력을 더 강화하기 위한 구조조정도 활발하다. 주로 기술.자본의 전략적 제휴를 통해 일어나는데, 적과 동지의 구분이 없다.

소니는 게임기에 들어가는 첨단반도체의 개발 및 생산을 위해 경쟁업체인 도시바와 손잡기로 했다. 전자업체 빅터는 비디오사업 분야에서 '불구대천 (不俱戴天)' 의 경쟁자인 소니와 제휴를 맺기로 했다.

자동차업체인 마쓰다는 미쓰비시자동차의 소형상용차 '데리카' 를 대신 생산하는 한편 미쓰비시측은 저연비가솔린엔진을 마쓰다에 공급하기로 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조만간 일본 국내산업계뿐 아니라 세계 전체의 산업지도를 뒤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지지부진하던 금융부문의 구조조정도 최근 본격화되고 있다. 15개 주요 은행의 경영정상화를 위해 일본 정부가 7조4천5백억엔 (약 74조5천억원) 의 공적자금 지원 방안을 확정, 해당 은행의 구조조정을 독려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큰 변화를 맞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도쿄 = 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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