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든 음악이든 '되새김질' 은 고된 노동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씹을 음식에 대한 철저한 파악과 자신의 소화기관에 대한 자신감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부터 갤러리 인 (02 - 732 - 4677)에서 열리고 있는 김장희 (55) 씨의 개인전은 '다시 그리기' 라는 나름의 개념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해석해 냈다.
김씨는 '아메리칸 아이콘과 타이타닉' 이라는 부제 아래 재스퍼 존스.프랭크 스텔라.앤디 워홀.케네스 놀런드 등 미국 현대미술의 대표작가들의 그림을 밑그림으로 삼은 후 자디잔 붓 터치로 화면을 가득 메워 원화 (原畵) 를 덮어버리는 작업을 보여준다.
그 결과 완성된 작품은 전혀 원작의 정체를 눈치챌 수 없는 점묘화다.
그는 이 방식을 통해 '세계화' 라는 개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미술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규격 자체가 '글로벌 스탠다드' 를 염두에 두고 끊임없는 변화를 요구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김씨는 '세계화' 란 결국 '미국화' 가 아닌가, 우리가 따라잡으려 하는 현대미술의 조류 역시 철저히 미국 중심의 흐름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컴퓨터그래픽 등 첨단기술을 동원한 블록버스터의 대명사 '타이타닉' 이 그의 집요한 붓놀림으로 인해 자취를 감추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규격' 의 소멸이다.
시각적으로도 그의 회화는 아름답다.
'아침 바다 갈매기가 금빛을 싣고' 파도 위를 날아가듯 미세한 물결의 떨림을 연상케하는 얇은 차일의 느낌이다.
김장희씨는 이화여대 미대와 일본 교토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9일까지.
기선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