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늑대와 양, 그리고 한국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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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러시아 속담에 외교의 요체는 늑대 (강대국)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주되 양 (국익) 이 잡혀먹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강대국의 각축장인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에겐 항시 염두에 두어야 할 말이다.

무엇이 늑대의 밥이고 무엇이 양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1년 전 필리핀 마닐라에서 노출된 한.러 외교전은 우리가 늑대를 먹이는 방법이 서툴렀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어설픈 한.일어업협정이나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무조건 지지해 중동에 진출해 있는 한국기업들의 활동에 먹구름이 끼게 한 결정들은 우리가 양을 쉽게 내어준 결과라 하겠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특집기사로 미국이 한국의 금융시장을 개방하려는 노력이 난관에 부닥치자 한국정부를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가입이라는 당근으로 유인해 미국이 원하던 것을 전부 얻어냈으며 한국은 이러한 과다한 양보로 급기야 국제통화기금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됐다고 분석했다.

옳은 외교적 판단을 내리는 데는 무엇보다 경험있는 전문가들의 뒷받침이 필요한데 우리 외교진에는 지역 및 이슈 전문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그 이유는 언제부턴가 외교통상부의 인사정책이 전문가를 기르기보다는 가급적 많은 외교관들을 골고루 모두가 선호하는 소위 노른자위직에 잠깐이나마 교대형식으로 근무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지난 7년동안 외교부의 유엔 및 국제기구담당 주무국장이 여섯번이나 바뀌었다.

문제는 이것이 외교부 전체의 일반관행이라는 데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아무리 우수한 사람들이라도 지속성은 물론 책임을 가지고 일을 추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또 3년 정도의 해외근무 동안에도 파견된 외교관리들이 두세번씩 소관업무를 바꾸기 때문에 전문성 축적은 더 힘든 실정이다.

이렇게 비전문가 충당으로 생기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외교부는 인해전술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수의 외교관을 해외공관에 파견하고 있다.

중요한 국제기구가 자리잡고 있는 파리.제네바.뉴욕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OECD 한국대표단의 경우 OECD 초년병이자 OECD 진출상황으로 보면 최하위선인 우리 처지와는 대조적으로 29개의 회원국 중 두번째로 많은 30명이 파견돼 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우리 대표단의 반수인 16명, 프랑스는 8명, 영국은 7명을 파견하고 있다.

제네바 주재 한국대표부 역시 30명의 직원으로, 이 숫자는 서방선진7개국 (G7) 회원국가들인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이탈리아의 대표단보다 큰 규모다.

유엔본부가 있는 뉴욕의 한국 대표부에는 1백85개 유엔회원국 중 일곱번째로 많은 33명의 정부직원이 근무하고 있는데 이 역시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영국을 앞지르는 수준이며 12명을 파견하고 있는 호주보다도 21명이나 많은 숫자다.

많은 숫자가 더 큰 외교적 성과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국제기구를 상대하는 우리 대표단들의 주요 관심사중 하나인 한국인 국제기구 진출을 하나의 척도로 보더라도 우리는 아직도 거의 모든 기구의 한인직원 적정선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비생산적이고 비능률적인 인사관행은 속히 정부운영 개편의 일환으로 개선돼야 한다.

외국의 경우 유엔기구 담당대사 등을 10여년씩 한 자리에 두어 유엔기구 고위직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에도 이시영 (李時榮) 유엔대사와 같이 유엔기구 주재지에 여러번 근무하며 전문성을 길러온 유능한 외교관들이 더러 있기는 하나, 현재의 외교부 관행이 계속된다면 이러한 전문외교관을 배출할 길이 없다.

구체적으로 우리 외교관들의 해외근무는 5년을 기본으로 하고 본부 근무도 3~4년씩은 해야 한다.

또 지역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비영어권, 즉 프랑스어.일어.중국어.서반아권 전문가를 우대해야 한다.

그리고 북미와 유럽 등 선진국 근무에 대한 과잉경쟁을 피하기 위해서는 개발문제와 중동.아프리카 등을 선호하는 인재들을 뽑고 영입해야 한다.

마지못해 가는 외교관들이 어떠한 마음자세로 국익을 대변하고 그 나라의 문화와 국민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대사 정년퇴직을 선별적으로 대폭 연기해야 한다.

값진 경험을 가진 우수한 외교관들을 나이만으로 퇴임시키는 것은 국익을 위해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개인욕구 충당을 위해 국익을 희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구삼열 유니세프 특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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